1998년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쓰던 드럼 가죽 하나가 찢어졌다. 당시 서울시향은 세종문화회관 산하 9개 예술단체 가운데 하나였고, 사실상 서울시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서울시향이 드럼 가죽을 바꾸기 위해 경비를 요구하자 서울시는 조례에 따라 조달청 단가로 입찰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아무도 드럼 가죽 하나 때문에 입찰에 응할 리 없었고, 서울시향은 가죽이 찢어진 드럼으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 공무원의 관료체계 아래서 운영되던 오케스트라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서울시는 1999년 7월 세종문화회관을 독립법인으로 전환하고 서울시향의 경영권을 세종문화회관 사장에게 넘겼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들과 서울시향 단원들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서울시향은 발전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99년 KBS교향악단이 84회의 연주회를 한 데 비해 서울시향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6회의 연주회만 열었다. 그나마 초대권을 뿌려서 객석의 절반을 채울 수 있었다. 서울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지만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그러던 서울시향이 2005년 6월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뒤 지난해 눈에 띄는 성적을 냈다. 법인화 이전인 2004년과 비교해 자체 수입이 1억 4000만 원에서 33억 2000만 원으로 껑충 뛰었다. 연주회 수는 61회에서 121회로 두 배가 됐고, 관객 수는 2만 4000명에서 16만 6000명으로 증가했다. 유료관객 비율은 34%에서 64%로 늘었다.
이 같은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음악에 완전 문외한인 것은 물론 40년 가까이 금융업계에서 ‘좌뇌’만 쓰고 살아온 전문경영인이었다. 바로 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이다. 그는 1967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 입행해 우리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2005년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서울시향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 회장은 서울시향 대표 시절 경영혁신을 이뤄낸 사례를 소개하기 위해 지난달 22일 연세대 글로벌 MBA 여름학기에서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번트 슈미트 교수가 맡은 수업인 ‘마켓 이노베이션’의 강연자로 나섰다. 서울시향의 경영혁신 사례는 슈미트 교수와 연세대 박헌준 교수(경영학)에 의해 강의 교재로 만들어졌으며, 다음달부터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수업에서 사용된다. 이 교재와 이 회장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시향의 변화 과정을 정리했다.
금융-음악 달라도 경영은 매한가지
“2005년 서울시로부터 서울시향의 대표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서울시향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처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키우겠다는 계획이었다.
나는 38년 동안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하다는 금융기관에서만 일해 온 터라 과연 감성적이고 우뇌를 쓰는 음악이라는 분야에서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음악, 특히 클래식음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금융은 돈을 매개로 하고 오케스트라는 음악을 매개로 한다는 것만 다를 뿐 경영이란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렸다.
2005년 6월 서울시향의 법인화와 동시에 내가 대표를 맡기 시작했다. 민간기업 출신의 전문경영인이 문화기관의 수장이 된 것은 한국에서 처음이었다. 이에 앞서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 정명훈 지휘자가 서울시향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임명돼 서울시향의 음악성을 높일 기회가 생겼다. 나는 경영을 책임지면서 먼저 세 가지를 목표로 정했다. 음악의 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는 것과 공공성 및 수익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관객’이 아닌 ‘고객’으로 불러라
“서울시향 대표가 되자마자 ‘관객’이라는 용어부터 없앴다. 관객이라고 하면 일회성에 그치는 느낌이 들고, 정성이 부족해 보인다. 대신 반복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뉘앙스를 주는 ‘고객’으로 바꿨다. 이 단어 하나가 굉장한 변화를 가져왔다. 직원과 단원들의 마인드 자체가 달라졌다.
회의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들을 포함해 전 직원 20여 명과 함께 했다. 사회생활을 처음하는 신입사원들이 대표와 함께 회의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반 기업이었다면 직원과 단원들에게 성과급을 굉장히 많이 줬을 텐데 그런 것이 없었던 게 CEO로서 가장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