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골 넣는 골키퍼’로 유명한 김병지 선수는 불안한 골키퍼라는 평가를 받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뛰지 못했다. 발기술은 좋지만 수비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빌드업(Build-up) 축구가 대세가 되면서 골키퍼에게도 정교한 볼 컨트롤이 요구되고 있다. 빌드업 축구는 골키퍼를 포함해 수비에서부터 플레이를 쌓아 올려 공격하는 전술이다. 수비 시프트(야구), 센터의 3점 슛(농구)처럼 과거 인정받지 못한 전술이나 플레이가 시간이 지나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후일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발견이 처음엔 인정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묻혀 있는 일이 적지 않다. 스포츠도, 비즈니스도 무엇이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례 1 1946년 7월14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연속경기(doubleheader) 첫 경기에서 11대10, 1점 차로 아깝게 패한다. 거의 매일 경기를 하는 야구에서 한 경기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패배 자체보다 더 힘이 빠진 것은 그 이유였다.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에게 5타수 4안타, 8타점을 빼앗긴 것. 거기다가 홈런을 무려 3개나 헌납했다. 윌리엄스에게 당한 충격이 큰 나머지 선수 겸 감독인 루 부드로(Lou Boudreau)는 두 번째 경기에서 ‘모 아니면 도’인 도박을 감행한다. 2번째 경기에서 윌리엄스가 첫 타석이 돌아오자 좌익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를 2루 오른쪽에 몰아놓은 것이다. (그림 1)
왼손 타자인 윌리엄스가 당겨 치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타석에서 4할 타자 윌리엄스가 친 공은 정확하게 위치를 바꾼 유격수 정면으로 날아가 잡힌다. 게다가 이 유격수가 다름 아닌 부드로! 윌리엄스 시프트라고도 불리는, 수비 시프트(defensive shift)의 시초다.
당시 많은 흥미와 관심을 끌었지만 윌리엄스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 수비 시프트를 사용하는 팀은 거의 없었다. 윌리엄스도 수비 시프트를 그리 자주 맞닥뜨리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이 족보 없는 작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등장한 요행수 정도로 보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실제 효과를 증명하기도 어려웠다. 윌리엄스에게 효과가 있는지조차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처음 시도했던 경기에서도 윌리엄스가 2타수 1안타를 기록해 고작 한 타석 성공했을 뿐이다. 길게 봐도 윌리엄스의 통산 타율은 시프트를 상대하기 전(.353)과 후(.348) 차이가 없다. 부드로는 시프트의 목적이 기술적인 효과보다는 심리 교란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윌리엄스는 “앞으로 팀들이 이런 짓을 하기 시작하면 나도 오른쪽 타석에서 치겠다”라고 농담까지 해가며 비웃었다고 하니 ‘심리 효과’도 신통치 않아 보였을 것 같다.
또한, 수비 시프트가 도발적 작전이었던 만큼 대응하는 아이디어도 금방 등장했다. 장타 욕심을 버린 3루 쪽 번트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실제 몇 타석 재미를 본 시카고 화이트 삭스가 수비 시프트를 계속 사용하자 윌리엄스는 좀처럼 대지 않던 번트로 시프트를 깨버린다. 화이트 삭스 감독 다익스(James Dykes)는 즉시 수비를 원위치시켜 버린다. 이렇다 보니 시프트는 전술적 가치보다는 오히려 윌리엄스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보여주는 증거 정도 외엔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후 50년이 넘게 수비 시프트는 제대로 된 전술이라기보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진풍경 정도에 불과했다.
사례 2 1990년대 초반 한국 축구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스타일로 플레이하는 골키퍼가 나타나 큰 인기를 끈다. 원래 골키퍼는 골문이나 잘 지키면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 선수는 강하고 정확한 킥과 드리블 능력, 거기에 100m를 11초에 달리는 뛰어난 스피드를 바탕으로 공을 차고 앞으로 나가는 적극적인 전진 수비를 펼쳤다. 1998년 10월24일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 울산과 포항이 1대1 동점으로 맞선 경기 종료 40여 초 전, 소속팀 울산이 마지막 프리킥 기회를 얻는다. 김병지는 포항 골대까지 올라와 극적인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골키퍼 최초 필드골 기록을 남긴다. ‘골 넣는 골키퍼’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선수 생활 중 그가 넣은 골이 무려 3골이나 된다.
그런데 다른 골키퍼에겐 없는 발기술이 김병지 선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 프로선수로서 인기를 얻는 데는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김병지는 선수 생활 내내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선수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다면 골키퍼로서 기량과 성과 면에선 어땠을까? 김병지가 선수 시절엔 공을 자주 몰고 나가 전진 수비를 펼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위험한 플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 때문에 킥과 발기술을 사용해 볼을 치고 나가는 일이 잦은 김병지는 화려하지만 수비 안정성이 떨어지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재능과 전례 없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김병지는 선수 인생 최대 시련을 겪기도 한다. 2001년 1월 파라과이와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중앙선 근처까지 볼을 몰고 나갔다가 뺏겨 실점으로 이어질 뻔했다. 이 실수에 당시 국가대표 감독 히딩크는 격노했을 뿐만 아니라 김병지가 불안한 골키퍼라는 최종 평가를 굳힌다. 결국, 축구선수로서 꿈의 무대였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골문만 잘 지키는 이운재에게 밀려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만다. 이후 오랫동안 우리나라 축구에서 김병지 선수 같은 볼 처리 능력과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