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내면의 다양한 자아를 쉽게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시대는 반대로 한 가지 자아만을 강요받으며 성장한 세대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평생 회사형 자아만을 강요받아온 현재 조직 내 임원이나 관리자급은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발맞추지 못한 채 혼란스러움을 호소한다. 이런 어려움을 겪는 조직의 리더들에게 필자는 해결 방안으로 △구성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회사형 페르소나 외 다른 페르소나를 개발할 것 △자신의 다층적인 면을 발현할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자리에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온전한 모습으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최근 부캐(부캐릭터) 열풍과 함께 ‘멀티 페르소나’가 새로운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멀티 페르소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시시각각 상황에 맞는 자아를 표출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직장에서와 직장 밖에서의 정체성이 다르고, 오프라인상에서와 SNS상에서의 정체성이 다른 것이 대표적인 멀티 페르소나의 특징이다. 이런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는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를 만들고 있다. 마케팅 영역에서는 ‘니치(Niche)한 시장이 리치(rich)하다’는 관점에서 한 개인의 욕구를 소수점 이하 단위로까지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늘고 있다. 게임에서 본캐 외에 키우는 부캐처럼 조직에서도 본캐와 부캐가 분리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멀티 페르소나 혹은 부캐 현상은 왜 트렌드가 됐는가? 그리고 리더들은 멀티 페르소나를 보이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멀티 페르소나의 정신분석학적 정의
사람은 늘 다중의 자아를 가진 멀티 페르소나적 존재였다. 우리는 페르소나를 통해 칭호를 획득하거나, 지위를 나타내거나, 이것저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타협에서는 흔히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관여한다.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개인 안에는 천 개의 페르소나가 있어서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집에서는 가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배우자의 페르소나를, 조직에서는 엄격하지만 유능한 부장으로서의 페르소나를, 그리고 동창생들과 있을 때는 여전히 장난기 많은 친구로서의 페르소나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뇌과학적으로도 우리는 단일한 자아 혹은 단일한 페르소나가 아니다. 뇌는 별도의 기능을 나눠 맡은 2개의 반구(hemisphere)로 이뤄져 있다. 좌반구는 언어적이고 명시적인 기억(explicit memory, declarative memory)을 담당하며 의식적 자아를 형성한다. 이에 비해 우반구는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을 담당하며 무의식적 자아를 형성한다.
이렇게 분리된 좌뇌와 우뇌의 기능을 잘 보여주는 임상적 사례가 있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책을 쓴 하버드대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다. 그는 37세에 극심한 두통과 함께 좌뇌가 심하게 손상되는 중증 뇌질환을 겪는다. 그는 남아 있는 우뇌를 통해 세상을 인지하면서 차츰 회복되는 좌뇌가 자신의 자아를 어떤 식으로 변형시키는지를 자세히 관찰해 기록으로 남겼다. 좌뇌는 사물을 범주에 따라 나누고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언어를 통해 사물을 파악하지만 우뇌는 직관과 이미지로 파악한다. 우뇌가 우세할 때의 테일러 박사는 긍정적이고 행복하며 어떤 것에도 제한받지 않는 무한대의 자아를 경험한다. 이후 치료를 통해 좌뇌가 회복돼 갈수록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현재의 문제와 자신이라는 경계에 집중하는 원래의 자아의 모습이 나타남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는 좌뇌적 자아와 우뇌적 자아가 분리돼 있는 ‘다중적 자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자아로 외부에 보이는 이유는 좌뇌와 우뇌가 ‘뇌량(corpus callosum)’으로 연결돼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 간, 그리고 명시적 기억과 암묵적 기억 간의 조율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만 3세 이전의 기억을 거의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좌뇌와 우뇌를 잇는 뇌량과 언어중추인 좌뇌가 충분히 발달하기 전이어서 기억이 암묵적 기억으로 무의식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다중 인격은 이러한 조율과 일치에 어려움이 생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다중 인격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77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납치 및 강간 혐의로 기소됐다 무죄를 선고받은 빌리 밀리건 사건이다. 빌리 밀리건은 어릴 적 계부의 성적 학대를 겪으며 자아가 분열되고 총 24개의 인격으로 성장하게 된다. 주(主) 인격인 빌리는 다른 인격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기억이 자주 끊어지며 시간의 흐름이 분절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범죄 행위로 인해 기소된다.
필자는 정신과 전문의 출신의 조직 및 리더십 개발 컨설턴트다. 고려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Bethesda Mindfulness Center의 ‘Mindfulness 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용인병원 진료과장과 서울시 정신보건센터 메디컬 디렉터를 역임한 후 기업 조직 건강 진단 및 솔루션을 제공하는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 임원 코칭과 조직문화 진단, 조직 내 갈등 관리 및 소통 등 조직 내 상존하는 다양한 문제를 정신의학적 분석을 통해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