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서는 잠룡이 비룡이 되기까지 여섯 단계의 성장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날아오르고자 하는 기업과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첫째,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근신하는 잠룡의 단계다. 둘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현룡의 단계다. 이때 인재 발굴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셋째, 역량 강화의 단계로 자강불식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 넷째, 공격적인 마케팅과 기업공개 등 과감한 움직임으로 도약하는 단계다. 다섯째, 비룡의 단계로 다시금 유능한 인재 등용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여섯째, 비룡이 명심해야 할 지침으로 과욕을 부려 선을 넘어선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잠룡(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으로 태어난다. 그렇다고 모두가 비룡(하늘을 나는 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잠룡의 시기를 슬기롭게 잘 견딘 사람은 비룡이 돼 하늘을 훨훨 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뜻을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기업에도 잠룡의 시절이 있다. 이 시기를 잘 통과한 기업은 비룡이 돼 글로벌 시장을 누비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은 로컬 마켓에서조차 날개를 펴보지 못한 채 도태되고 만다. 잠룡은 어떻게 비룡이 되는가? 주역 중천건괘가 그 비결을 일러 준다.
중천건괘는 주역 64괘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괘다.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가 아래위로 중첩돼 있는 것이 중천건괘인데, 천지창조와 생장의 원리를 밝히고 있는 괘다. 양효() 여섯 개로 구성돼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중천건괘는 우주가 탄생할 때 있었던 빅뱅처럼 팽창하려는 기운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다. 충만한 양기를 받아 자연은 생명의 싹을 틔우고 성숙한 모습으로 도약한다. 돋아난 식물의 줄기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날갯짓을 배운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유아기를 거쳐 어른으로 성장한 동물은 강건한 모습으로 들판을 누빈다. 주역에서는 이러한 성장의 과정을 여섯 단계로 구분해서 단계별 행동 지침을 일러 주는데 이 수칙을 잘 따르면 비룡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중도에 낙마한다.
잠룡에서 비룡으로
첫 번째는 잠룡의 단계인데, 이 시기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근신해야 한다. 주역에서는 이를 잠룡물용(潛龍勿用)이라고 표현한다. 물(勿) 자는 영어에서 ‘Never’에 해당된다.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정도의 권고가 아니라 절대로 하지 말라는 강한 부정문이다. 용(用)은 쓸 용 자인데 사람을 고용한다는 의미의 용이 아니라 스스로의 움직임, 즉 행동이나 몸가짐을 뜻한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데이터를 근거로 조언하건대 잠룡의 시절에는 몸을 바짝 낮추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잠룡 시절의 한신(중국 한(漢)나라 초의 무장)은 동네 깡패들의 가랑이 밑을 기면서 바짝 엎드려 지냈다. 그때 만일 한신이 욱하는 심정으로 깡패들과 맞장을 떴더라면 초한지의 영웅 한신도, ‘배수의 진’이라는 유명한 병법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공명도 비룡이 되기 전 잠룡 시절에는 일체의 나댐을 삼갔다. 유비가 그를 세 번 찾아왔지만 제갈공명은 모두 사양했다. 겸양이 아니라 잠룡 시절의 맵(map)대로 한 것이다. 잠룡 시절의 제갈공명은 땅에 바짝 엎드려 있었던 와룡(臥龍)이었다. 세종은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태종이 죽을 때까지 몸을 숨겼다. 장인이 역모의 수괴로 몰려 사사를 당하고, 장모는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등 처가가 풍비박산 났지만 세종은 비정할 정도로 침묵했다. 그때 만일 사사로이 연민의 정을 앞세워 태종에게 맞섰더라면 세종은 비룡이 되기 전에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에게도 잠룡의 시절이 있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창업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을 드러내기 전에 그들은 창고 안에서 바짝 엎드려 지냈다. 창고는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이 잠룡 시절 숨어 있었던 연못이었다.
두 번째는 현룡(見龍)의 단계다. 잠행을 끝내고 세상에 나가 서서히 이름을 알리는 시기가 현룡 단계인데 주역에서는 이때 가장 중요한 행동 지침이 네트워킹이라고 말한다. 중천건괘의 효사에 나와 있는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이다. ‘현룡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는 뜻인데, 밭(田)은 현룡이 자신을 드러내는 세상을 상징한다. 기업으로 말하면 시장이다. 물건을 시장에 출시하면 그것이 잘 팔릴 수 있도록 하는 홍보 전략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일 텐데 주역에서는 그보다 인적 자원을 발굴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利見大人)고 조언한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기업들 가운데 유난히 공동 창업이 많았던 점을 보면 세상에 몸을 드러낼 시점인 현룡의 단계에서는 무엇보다 인재의 발굴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는 주역의 가르침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 총장과 한서대 대우 교수, 중부대 초빙 교수 등을 지냈다.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에 『다시, 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존재의 제자리 찾기; 청춘을 위한 현상학 강의』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실리콘밸리로 간 노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