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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다이소의 균일가 상품 전략

납품가 10원 깎으려 6개월 기다려... 1000원짜리 제품 팔아 매출 1조 도전!

김선우 | 131호 (2013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임채범(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다이소아성산업 박정부 회장(69) 1997 5월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10평 크기의 ‘1000원 숍을 냈다. 첫 다이소 매장이었다. 당시 가게 이름은아스코이븐프라자였고 제품의 가격대는 500, 1000, 1500, 2000원의 4가지였다. 박 회장은 제품 기획과 물류 관리 등 바쁜 하루 일정을 끝내고 나면 저녁 때 매장을 찾곤 했다. 하루는 매장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연인인 듯한 남녀가 매장 앞에서 옥신각신 다투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구경하고 가자고 하는데 남자가 “1000원짜리만 파는 데를 창피하게 왜 가하면서 여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결국 남자 손에 이끌려 가게로부터 멀어지는 여성을 보면서 박 회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박 회장은 최근 매장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한 고객의 휴대전화 대화를 듣게 됐다. “나 다이소 왔거든. 지금 쇼핑 중이니까 조금 이따가 다이소에서 만나자. , 커피숍 말고 다이소로 와.”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1호점 개장 이후 16년 만에 전국에 900개 가까운 다이소 매장(2013 6월 초 현재 890여 개)이 생겼다. 이제 다이소는 싸구려 상품을 파는 곳이 아니다. 25000여 개에 이르는 다양하고 싼 제품을 둘러볼 수 있는 쇼핑의 즐거움을 주는 곳으로 변모했을 뿐 아니라 만남의 장소 역할도 하고 있다.

 

다이소의 최대 강점은 다양한 상품을 싸게 선보인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박리다매다. 이러한 강점은 탁월한 상품개발 능력에서 나왔다. 상품개발 능력은 일본 다이소에 납품을 하며 쌓은 노하우 덕분에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상품 개발만 뛰어났다면 고속성장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이소는 다양한 상품을 가지런하게 진열한 깨끗하고 밝은 매장 전략을 내세우며 고객을 매장으로 불러들였다.

 

일본 시장에서 살아남은 노하우

회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이소는 일본과 관련이 있다. 일본 다이소는 100엔숍의 대명사로 일본 내 2500여 개의 체인망을 구축, 시장의 70%를 장악한 유통업체이며 100엔숍을 백화점, 양판점, 편의점에 이은 일본 제4의 유통채널로 업그레이드한 업체다. 이런 일본 다이소에 연 15000∼18000만 달러어치의 상품을 공급하는 기업이 한국 다이소의 모기업인 ㈜한일맨파워다. 한일맨파워는 일본 다이소산업의 최대 납품 업체로 연간 수출 물량이 수량 기준으로 5억 개에 이른다. 매일 20피트짜리 컨테이너를 39개씩 실어 나르는 수준이다.

 

박 회장은 대학 졸업 후 15년 동안 서울 구로공단에서 전구, 형광등을 만드는 풍우실업에서 일했다. 공장장으로 있을 당시 회사에 위장 취업자를 중심으로 노조가 결성되면서 오너와의 갈등이 깊어져 1988 40대에 회사를 나왔다. 이후 국내 기업 임직원의 일본 연수와 세미나를 지원하는 한일맨파워를 설립했다. 일본과 사업을 계속하던 중 히로시마에 본사를 둔 일본 다이소산업을 알게 됐고 한일맨파워가 일본 다이소산업에 생활용품을 독점 공급하게 되면서 박 회장은 균일가 사업에 눈을 돌리게 됐다.

 

하지만 일본 다이소와의 사업은 쉽지 않았다. 일본 다이소의 야노 히로다케(矢野博丈) 회장은 매우 까다로운 사람으로 100엔짜리 제품이라도 품질이 떨어지면 눈앞에서 가차없이 집어 던지곤 했다. 많은 업체들이 납품을 시도했지만 야노 회장의 높은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 거래가 끊겼다. 납기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예 납품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박 회장은 일본 다이소에 납품을 하기 위해 싸고 좋은 제품을 찾아 직접 전 세계를 발로 뛰었다. 남들은 싼 제품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만 향할 때 박 회장은 해당 제품을 가장 잘 만드는 국가를 찾아 20곳이 넘는 나라를 돌아다녔다. 해외 각국은 저마다 강점이 있는 상품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인도는 면제품과 스테인리스의 품질이 우수하고, 터키에는 유리제품이, 포르투갈은 도기제품, 브라질은 접시 등에 경쟁력이 있다. 박 회장은 이러한 상품을 찾아 다니면서 상품을 개발하고 업체 유지를 위한 관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품을 공급을 받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일맨파워는 일본 다이소 해외 물량의 3분의 1을 공급할 정도로 성장했다. 박 회장은이걸 상품이라고 가져 왔냐는 질책부터 시작해 주문 안 할 것 같아서 일어나 나오려 할 때 가격 깎기,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트집잡아 클레임 걸기 등 일본 업체들의 까다로운 기준을 넘기며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결국은 제대로 된 상품밖에 기댈 것이 없었다. 박 회장은 일본으로 수출하는 품목 중 한국에서도 잘 팔릴 것 같은 상품을 따로 한국 다이소 매장에 진열 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국 시장에도 적응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점포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다이소와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일본 다이소는 박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사 한일맨파워가 일본 내에서는 다이소와 독점적으로 거래하기를 원했다. 워낙 물량이 많아 박 회장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박 회장은 언제 거래를 끊어버릴지 모르는 까다로운 일본 다이소와의 관계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한국에 균일가 매장(당시 이름은 아스코이븐프라자)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는데 일본 다이소에 신뢰 관계 지속을 위한 지분 투자 요청을 했다. 일본 다이소는 2001년 투자를 통해 34.6%의 한국 다이소 지분을 갖게 됐고 한국 내 기업명은 아성산업에서 다이소아성산업으로 바뀌었다. 이후 일본 다이소와 한국 다이소 사이에 배당이나 로열티, 인적 교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 다이소에서 매년 20∼30%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한국 다이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한국 다이소가 물류나 매장 수준에서 일본 다이소보다 15년가량 앞서 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러한 일본 다이소와의 관계는 지금까지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한일 관계가 냉랭해진 이후에는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회장은다이소아성산업은 일본 지분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기업이며 일본 다이소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 기업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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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우

    김선우[email protected]

    경영 칼럼니스트

    필자는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인문 지리학을 전공했고 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12년 동안 동아일보와 DBR에서 기자로 일했다. 미국워싱턴주에 거주하면서 네이버 비즈니스판, IT전문 매체 아웃스탠딩 등에 미국 IT 기업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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