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미 성공비결과 약점
Article at a Glance-전략, 운영, 마케팅
1. 샤오미의 성공 비결/창립 철학인 ‘인터넷 사유’ 1) 집중: 애플처럼 매년 1∼2개의 제품에만 집중 2) 극치: 고성능 하드웨어 장착 3) 빠른 속도: 마니아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매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4) 입소문: 소비자의 초기 기대치를 낮추고 그 이상을 전달해 깜짝 놀라게 만드는 효과 2. 샤오미의 약점 1) 치열한 시장 경쟁과 핵심 경쟁력의 부재 2) 하드웨어 제조능력이 없어 공급사슬 업체들의 방해를 받음 3) ‘헝거 마케팅’의 피로효과와 AS에 대한 불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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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교활하고 영리한 인물로 코린트의 건설자이자 왕이다. 신들의 노여움을 산 시시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바위가 너무도 무거워서 매번 정상에 다다르기도 전에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영원토록 그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시시포스는 비극적 영웅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 베이징샤오미과기유한책임공사(이하 ‘샤오미테크’)의 회장 레이쥔(雷軍)은 자신이 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중국의 1세대 IT 재벌인 레이쥔은 1992년 훗날 ‘IT 사관학교’로 불리게 되는 킹소프트(KingSoft) 주식회사(이하 ‘킹소프트’)에 입사한다. 1998년부터 회사 경영을 맡은 그는 8년 동안 다섯 번의 상장 과정을 겪은 끝에 2007년 킹소프트를 홍콩 증시에 상장시켰다.
킹소프트보다 늦게 세워진 텐센트(1998년 설립, 2004년 상장)나 바이두(2000년 설립, 2005년 상장), 알리바바 B2B(1999년 설립, 2007년 상장, 2012년 상장폐지) 등에 비해 상장이 늦었기 때문에 킹소프트의 상장 당일 시가총액은 위의 세 회사보다 훨씬 적었다. 상장 당일 종가를 기준으로 킹소프트의 시가는 52억7500만 홍콩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텐센트는 69억7000만 홍콩달러, 바이두는 39억5800만 미국달러(약 300억 홍콩달러), 알리바바 B2B는 257억 미국달러(약 2000억 홍콩달러)에 달했다.
킹소프트 상장 두 달 후 레이쥔은 CEO직에서 물러나 2010년 4월 새로운 회사를 세울 때까지 엔젤투자자로 활동한다. 그가 세운 회사는 스마트폰을 핵심 사업으로 하는 샤오미테크였다. 설립 후 샤오미테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 매출액이 2011년 5억5000만 위안에서 2012년 126억5000만 위안, 2013년 316억 위안으로 뛰어올랐다.1 그리고 레이쥔이 샤오미를 경영하면서 정리한 ‘인터넷 사유[互聯網思維]’는 더 큰 명성을 얻게 됐다.
샤오미의 성공으로 레이쥔은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운명에 마침표를 찍은 듯하다. “나는 돌을 산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고 올라가는 건 힘이 들 뿐만 아니라 굴러 떨어지는 돌에 치일 수도 있다. 우선 산꼭대기에 올라간 다음 돌을 차면서 내려가야 한다.”2
킹소프트에서 샤오미테크까지 레이쥔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은 것일까? 소위 말하는 ‘인터넷 사유’의 본질은 무엇이며, 인터넷 사유의 핵심인 소셜마케팅은 또 어떻게 운영되는 것인가? 샤오미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체 무엇인가? 가파른 성장 이후 샤오미는 어떠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시장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확대해 나갈 것인가?
설립 배경
레이쥔, 그는 누구인가
1987년, 만 18세에 불과했던 레이쥔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밸리의 불(Fire in the Valley)>을 읽게 된다. 잡스와 워즈니악 등이 애플컴퓨터를 만들어 세계를 변화시킨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레이쥔의 꿈의 원천이 됐다. 이때부터 레이쥔은 ‘세계일류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는다. 이후 그는 2년 만에 대학 4년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우한대학(武漢大學)의 장학금을 독식했다.3 3, 4학년 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고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며 보냈다.4 1991년 대학을 졸업한 후 레이쥔은 베이징으로 갔다. 한 컴퓨터 전시회에서 킹소프트 창업자인 추보쥔(求伯君)을 만난 그는 후에 킹소프트의 6번째 직원이 됐다.5 킹소프트에서 15년을 근무하면서 WPS(워드프로세서, MS Office 같은 종류의 제품)와 킹소프트 츠바(번역 소프트웨어), 킹소프트 두바(백신 소프트웨어), 게임 개발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세와 불법 복제 기승으로 중국의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킹소프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결국 이 성실하고 단합된 회사가 상장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6
2007년, 킹소프트를 성공으로 이끈 뒤 레이쥔은 회사를 떠나 한동안 전업 엔젤투자자로 활동한다. 2014년 5월까지 총 30여 개의 기업에 투자했는데 그중 라카라, VANCL(凡客誠品), UCweb, 둬완(多玩), 러타오(樂淘) 등 많은 회사들이 각 영역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보였다. 성공적인 투자자의 길을 걸으면서 레이쥔은 성공의 트렌드를 읽는 법과 완벽한 모바일 인터넷 상품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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