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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피아앙티폴리스

전원도시가 지혜를 만나 기업도시로…

김민주 | 48호 (2010년 1월 Issue 1)
프랑스의 기업도시 소피아앙티폴리스(Sophia Antipolis). 이름만 들어서는 그리스의 어느 도시로 착각할 수도 있다. 도시 이름은 그리스어로 ‘지혜’라는 뜻의 ‘소피아’와 대도시의 반대 개념인 ‘전원도시’라는 뜻의 ‘앙티폴리스’의 합성어다. 소피아앙티폴리스는 프랑스의 니스와 칸, 모나코 등 ‘프렌치 리비에라(French Riviera)’로 불리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유럽 최고의 기업도시다. 행정상으로는 프랑스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 지역, 알프마리팀 지방에 속한다. 기존 도시 내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는 세계 대부분의 기업도시와 달리 프랑스 남부 2300헥타르(약 690만 평)의 포도밭과 올리브나무가 있던 농촌 지역에 의도적으로 산업과학단지 중심의 기업도시가 조성됐다. 무에서 유를 일군 계획 도시가 바로 소피아앙티폴리스다.
 
선견지명이 있는 혁신가와 정부의 합작
소피아앙티폴리스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혁신가의 지혜와 그의 선견지명을 믿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정부가 만들어낸 공동 작품이다. 1960년 프랑스 최고 그랑제꼴 중 하나인 파리광산대학(ENSMP)의 피에르 라피트 교수는 지중해 연안에 ‘과학, 문화, 지혜가 어우러진 미래 도시’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의 고향인 알프스 해안 알프마리팀이 새로운 경제 발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 제안을 했다.
 
 

 
라피트 교수는 이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정부, 대학, 국회 등을 쫓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설득했다. 마침내 ‘과학과 지혜의 도시’ 건설 계획이 확정됐고, 1969년 소피아앙티폴리스협회가 구성됐다. 미래지향적 기업도시 탄생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소피아앙티폴리스는 출범 당시 프랑스 정부에 요청을 해 5개 코뮌(프랑스 최소행정구역)에 걸친 부지를 ‘개발유보지역’으로 지정받았다. 1972년 알프마리팀 지자체정부는 중앙정부와 합의해 소피아앙티폴리스 건설 계획을 ‘국가적 개발사업’으로 확정하고 기업, 연구소, 대학 유치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 1974년 최초로 프랑스석유연구소(FRANLAB)와 지오피직스(Geophysics)가 소피아앙티폴리스에 입주하게 됐다. 이어 1975∼1977년에 스위스 취리히의 유명연구소인 롬앤드하스(Rohm and Hass)를 비롯해 파리광산학교 분교, 국립과학연구소(CNRS), 에어프랑스 세계예약센터 등이 차례로 소피아앙티폴리스에 들어섰다.
 
 

 
진척이 더디던 소피아앙티폴리스 건설 계획이 크게 비상하게 된 계기는 1982년이다. 새로 취임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권력의 지방 분산화 정책’ 공약을 실행에 옮기면서 지역 개발 결정권이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위임됐다. 알프마리팀 지방정부는 소피아앙티폴리스 도시 건설에 관한 권한을 모두 위임받아 기업, 연구소 유치에 적극 나섰고, 이 결과 1982년에만 무려 125개 공기업 및 정부연구소들이 소피아앙티폴리스에 입주했다.
 
소피아앙티폴리스의 성장 가능성이 커지자 1985년 115개, 1986년 150개, 1987년 88개, 1989년 94개의 기업이 새로 입주했다. 소피아앙티폴리스 측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활성화하고 쾌적한 주거 업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주택 1300채를 새로 건설하고, 200여 개의 점포, 서비스업체, 용역업체, 학교, 병원들을 유치했다.
 
위기가 더 큰 도약의 계기로 작용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위기가 찾아왔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산업구조 재편이 진행됐다. 기업들은 대량해고와 구조조정에 나섰다. 경제위기의 불똥은 신생 도시인 소피아앙티폴리스로 튀었다. 내부적으로 곪았던 문제도 터져나왔다. 정부 주도로 소피아앙티폴리스 건설 계획이 이뤄져 기업, 연구소, 학교 등 입주 기업과 단체들 사이에 소통과 교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변 지역사회에도 고용 파급효과가 미치지 못했다.
 
안팎의 위기는 초기 성과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려는 소피아앙티폴리스에 자극제가 됐다. 위기가 오히려 도약의 발판을 다지는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이 도시는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을까.
 
첫째, 대기업의 구조조정은 자생적인 벤처기업 형성의 토양이 됐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대기업들은 더딘 진척을 보이던 소피아앙티폴리스 건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입주 기업들은 서둘러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직원들을 해고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된 직원들은 소피아앙티폴리스를 떠나지 않았다. 도시의 훌륭한 주거, 교육, 사업 환경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 도시에서 창업을 시작했고, 대기업의 아웃소싱 일거리를 받았다. 새로운 기업이 속속 설립되면서 도시는 내생적 혁신 클러스터의 외형을 갖추게 됐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활발한 교류가 산업의 활력을 북돋는 선순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둘째, 위기에 직면한 대기업들은 파견 인력 수를 줄이고 부족한 노동력을 소피아앙티폴리스 현지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는 지역사회에 기회가 됐다. 지역에 새로운 일자리가 늘고, 대기업과 지역사회가 동반 성장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셋째, 소피아앙티폴리스에 위기가 닥쳐올 무렵에 이미 입주했던 대형 연구소의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구소들이 내놓는 연구결과를 상업화하기 위한 기업들이 속속 설립되면서 도시의 산업 기반도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넷째, 1984년에 설립된 소피아앙티폴리스재단은 소피아앙피폴리스의 큰 문제로 꼽혔던 내부 소통 단절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나섰다. 이 재단은 전문가 클럽, 취미 동호회, 동종 기업 간 협회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인적 교류와 정보 교환이 활성화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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