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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Money in the Brain

면접관들이여, 당신의 남성성을 잠재워라

정재승 | 64호 (2010년 9월 Issue 1)
 
 

편집자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정재승 교수가 인간의 뇌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 및 경제적 의미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 캠퍼스, 일단의 남녀학생 무리가 교실로 들어가자 실험자가 간단히 실험을 소개한다. “이 실험은 남녀 간 수학적 능력에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앞에 놓인 문제들을 모두 최선을 다해 풀어주세요.”
 
이 남녀 학생들의 평소 수학 점수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 실험 결과, 여학생들의 수학 점수가 형편없이 낮게 나왔다. ‘수학적 능력의 성 차이에 관한 연구’라는 말에 여학생들이 지나치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남학생들의 성적은 오히려 올랐다.)
 
우리의 뇌는 고정관념으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은 모성적이고, 흑인 남성은 공격적이며, 유대인은 지갑을 절대 열지 않을 것이라는 성적,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아줌마는 억척스럽고, 아저씨는 뻔뻔하며, 요즘 애들은 버릇없고, 나이든 노인은 성욕을 잘 다스린다고 굳게 믿는다. 직업에 대한 편견도 만만치 않다. 예술가는 섬세하고, 정치가는 권모술수가 능하며, 교수는 좀스럽지만, 사업가는 통이 크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다. 평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여지없이 우리의 뇌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이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은 ‘스키마’, 즉 뇌가 정보를 여러 범주로 조직화할 때 이용하는 기록 체계의 일종이다. 스키마는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들 속에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일찍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정확하다면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의지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경험을 종종 겪곤 한다. 연약한 아줌마, 정중한 아저씨, 예의바른 청소년, 성적인 노인, 정직한 정치가, 대범한 교수, 섬세한 사업가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다.
 
세상의 모든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광고 기법은 이런 고정 관념을 점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예쁜 여성이 모델로 등장하는 화장품 광고 사진을 본 후 화장품을 바라보면, “나도 저 화장품을 바르면 저 모델처럼 예뻐지겠지”라고 기대한다. 멋진 남성 모델이 가만히 웃는 모습만 봐도, 그 다음에 본 제품에 대한 호감이 절로 생긴다. 앞에 제시한 자극이 다음 사건을 판단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고가 ‘고상한’ 현대 남성들에게 끼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 실험이 있다. 두 집단의 남성에게 텔레비전 광고를 보여준다. 한 집단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린 성차별적 광고를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에는 성적인 표현이 전혀 없는 광고를 보여준다. 그런 후에 피험자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련의 문자열이 무슨 단어인지 판단하는 과제다.
 
흥미롭게도, 성차별적인 광고를 본 남성들은 다른 집단의 남성들과는 달리, ‘어머니’ ‘누나’처럼 성적 뉘앙스가 없는 단어보다는 ‘베이브(babe·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 ‘빔보(bimbo·백치 미인)’처럼 성차별적인 단어를 더 빨리 알아봤다. 즉 광고가 여성이라는 스키마를 ‘성적인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광고를 통한 고정관념의 점화는 실제 생활에서도 남성들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광고를 본 후, 실험자의 요청에 따라 여성 구직자에 대한 면접을 실시했다. 이 면접에 광고가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묘사한 광고를 본 남성은 다른 집단의 남성들에 비해 여성 구직자들에게 더 바짝 다가가 앉았고, 더 많이 치근덕거렸으며, 성적으로 부적절한 질문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여성 구직자 앞에서 남성 면접관은 마치 ‘제 짝을 찾는 수컷처럼’ 행동했다.
 
성차별적인 광고는 여성 구직자에 대한 남성들의 기억과 자격평가 능력 또한 편향되게 만들었다. 성이 점화된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적 외모는 많이 기억했지만, 업무 적합성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별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여성 구직자들의 능력을 판단해 달라는 질문을 실험자에게 받자, ‘(여성 구직자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성들이 다른 집단의 남성들보다 여성 구직자의 채용을 추천하는 비율은 훨씬 높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성이 점화된 남성들이 그렇지 않은 남성들보다 여성 구직자들을 더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함께 일할 동료,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뽑은 게 아니라 ‘교미를 할 가능성이 높은 성 상대자 (mating partner)’를 뽑은 모양이다.
 
사람의 얼굴을 판단하는 데 뇌에서 필요한 시간은 약 0.4초다. 우리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0.2초다. 다시 말해, 그가 누구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우리 뇌는 상대방의 매력도를 알아챈다. 소개팅 자리, 맞선 자리에서 그녀가 매력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1분이나 10초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외모라는 기준에 대해서만.
 
정글에서 생활하는 원시인들에겐 유익했을 이 빠른 판단 능력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선 종종 잘못된 판단을 일으킨다. 기업 채용 때 면접관의 뇌에선 모든 이성 구직자를 바라볼 때 이 회로가 작동한다. 정치가를 뽑을 때도, 선생님을 바라볼 때도, 심지어 성직자가 신도를 대할 때도 이 회로는 여지없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 빠른 판단 회로가 내린 선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소한의 양심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매력적인 이성 구직자에게 그럴듯한 채용의 이유를 붙여준다. “우리가 맡길 업무는 고객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업무인데, 나는 왠지 이쪽 사람이 더 사회적일 것 같아” “입사서류를 보니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군. 우리 기업 문화에 더 잘 맞을 것 같아” 등의 이유를 붙여 그녀를 뽑기 위해 안달한다.
 
이 일련의 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면접관의 뇌에선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숙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암암리에 직무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사람들을 뽑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고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는 마지막 최종 선정 시간에 총대를 메고 이 문제를 제기하며 한 번 더 토론해야 한다. “혹시 우리가 이 사람을 뽑은 이유가 외모 때문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그러면 채용에서 더 좋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오류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고 실험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한다면, 면접 전에 면접관들에게 ‘우주나 바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줘라. 그러면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면접에 임할 것이다. 고래가 교미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건 빼고.
 
필자는 KAIST 물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예일대 의대 정신과 연구원, 컬럼비아대 의대 정신과 조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창의적인 문제 해결, 뉴로 마케팅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2009년 다보스 포럼 ‘차세대 글로벌 리더’로 선정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정재승의 도전 무한지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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