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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죽이고 또 죽여라” 과감함이 낳은 승리

임용한 | 107호 (2012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과달카날 전투는 1942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에 위치한 과달카날섬 주변을 둘러싸고 미일 양국 간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 개전 후 미군이 일본군에 가한 첫 번째 공세로 기록된다. 이는황소라는 별명의 핼시가 곰리 중장의 뒤를 이어 미군 남태평양 사령관을 맡으면서 가능해졌다. 이전까지 곰리가 이끌던 미군은 소극적인 태도로 수비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핼시는일본군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라는 어록에서 보여지듯 공격적인 태세로 일본군을 죄어왔다. 과달카날 전투 중 대표적 교전은 3차 솔로몬 해전(11)으로 미군과 일본군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핼시는 일본군에 두려움을 일깨웠고 미군에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승기를 이끄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진주만 습격 당시 미 해군의 주력 항모는 렉싱턴, 요크타운, 호넷, 엔터프라이즈, 에섹스였다. 렉싱턴은 산호해 해전에서,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각각 침몰했다. 엔터프라이즈와 에섹스만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제일 유명하고 사람 못지 않은 전쟁영웅이 된 배가 엔터프라이즈였다.

 

‘황소’ 핼시 제독

이 엔터프라이즈 호를 이끈 함장이 윌리엄 F.핼시(Willam F.Halsey) 제독이었다. 엔터프라이즈 호를 떠난 후에도 엔터프라이즈의 영원한 함장으로 기억된 핼시의 별명은황소(Bull)’였다. 그만큼 뚝심 있고 공격적이며 카리스마가 남달랐다. 엔터프라이즈는 항모전대의 기함이어서 함대 사령관인 핼시가 엔터프라이즈에서 지휘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작 핼시가 중요한 전투를 직접 지휘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점이다. 진주만 습격 때는 엔터프라이즈를 몰고 훈련을 나가 있었고, 둘리틀 습격 때는 자매함인 호넷에서 발진했으며, 산호해 해전 때는 다른 곳에 파견돼 있었다. 역사적인 미드웨이 해전 때조차 그 직전에 과로로 풍토병이 발생해 장기간 요양을 해야 했다.

 

퇴원해서 항모로 복귀한 핼시는 1942년 가을, 드디어 피할 수 없는 격전의 현장으로 돌입한다. 과달카날 전투(1942 87∼1943 29)가 한창인 솔로몬제도 해역이었다. 그러나 핼시는 이때에도 엔터프라이즈 호를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산타크루즈 해전 직전에 니미츠 제독이 남태평양 사령관 곰리 중장을 해임하고 핼시를 후임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핼시는 항모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니미츠는 강권하다시피 핼시를 압박해서 사령관 자리에 앉혔다.

 

소심한 지휘관, 곰리

핼시가 엔터프라이즈를 떠나 남태평양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건 과달카날의 심각한 상황과 곰리의 소심한 지휘 태도 때문이었다. 과달카날 전투 초반, 미 해병대는 상당한 고전 중이었다. 자칫 보급이 끊겨 고립돼 전멸할 수도 있는 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곰리는 도무지 나가 싸우려 들지를 않았다.

 

전쟁에서 수비 위주의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데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모험을 할 필요 없이 현상유지만 해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다. 전쟁이고 경영이고 이렇게 하면 반드시 진다. 그 사례는 전사에 패배자의 무덤만큼이나 잔뜩 쌓여 있다. 두 번째는 적이 장기전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경우다. 이런 경우라면 수비 위주의 태도가 바람직하다. 전투를 회피하는 게 실제로는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가 제일 흔한 경우인데 적이 우세하므로 일단 수비를 굳히고 적의 빈틈을 노리거나 나의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곰리의 경우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태평양의 전황은 미군에게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기가 막힌 행운이 던져준 승리였다는 사실은 미군 지휘관들이 더 잘 알았다. 여전히 일본군은 강했고 항모, 함재기, 전함, 구축함의 성능은 미군을 압도했다. 특히 함포로 대결하는 전통 해상전의 주역인 전함에서 미군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50척이 넘는 기존 전함들은 성능이 나오지 않아 해전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일단 속도가 항모보다 느려서 항모전단이 데리고 다닐 수가 없었다. 항모가 없으면 미군은 해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드넓은 태평양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3척뿐인 항모로 커버할 수는 없었다. 다른 곳에서 전함, 순양함, 구축함끼리 조우하면 미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미군은 야간전투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고 일본군은 야간에 아주 익숙했다. 행여나 야간에 함대가 맞부딪히면 거의 장님과의 전투가 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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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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