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42년 9월의 어두운 밤, 독일군 점령지인 리비아 벵가지 근처의 도로 위로 기관총을 거치한 여러 대의 무개(無蓋) 지프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사하라 특공대(The Rat Patrol)’라는 TV 드라마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영국군의 사막전 특수부대였다.
습격 목표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특공대는 도로 가운데 설치된 검문소와 바리케이드를 발견했다. 전투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휘관은 차에서 내리더니 검문소의 독일군을 향해 파시스트식으로 경례한 후 이렇게 소리쳤다. “전투를 시작하자!”
아무리 이런 일화를 나열해도 전쟁터란 비열하고 잔인한 곳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장교들 사이에선 기사도에 대한 미련이나 잔재 같은 게 약간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은 이 시기에 선보이기 시작한 특수전이나 현대적 게릴라전과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혐오했다. 물론 보다 솔직한 이유는 기사도 정신이 아니라 특수전의 성공가능성과 효과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만도의 병사 선발 요건
1940년 영국에서 코만도를 창설했을 때 코만도에 자원한 장병들은 ‘막연함’이라는 벽에 부딪혀야 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습격해서 치고 빠진다’는 모토 외에는 구체적인 목표, 전술, 가능성, 훈련방법 등 모든 게 막연하고 선례도 없었다. 제일 중요하면서도 모호했던 과제는 병사의 선발요건이었다. 어떤 병사가 특공업무에 적합할까? 목표와 작전 규모, 실행방식도 암담한데 기준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답은 병사들 스스로에게서 나왔다. 코만도 창단 멤버이며 제3코만도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존 던포드 슬레이터(John Dunford Slater) 중령이 그중 한 명이었다.
던포드는 완벽한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군 대위였고 어머니는 군인의 딸이었다. 하나뿐인 누이동생은 커서 해군 제독과 결혼했다. 던포드가 5살 때, 1차 대전에 참전한 부친이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던포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네가 대를 이어 군인이 돼야한다.” 그리고 13살 때 아들을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가문으로만 보면 녹색 피가 흘렀을 것 같은 던포드지만 놀랍게도 그는 학교에서 부적응자가 됐다. 그는 훈련, 내무생활, 복장군기, 그리고 행군에 염증을 냈고 왜 이런 게 필요한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아르헨티나의 팜파로 가서 초원의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반드시 군인이 돼야 하며 아버지가 전사하신 그 연대에 입대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던포드가 자신의 꿈은 말을 타는 카우보이라고 하자 모친은 황당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토록 말을 타고 싶다면 포병에 지원하거라.” 이때만 해도 말로 포를 끌었기 때문에 포병대에는 말이 지급됐다.
던포드는 모친에게 굴복했고 포병이 돼 성실하고 유능한 장교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일화 속에 이미 코만도 전사로서의 중요한 자질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직과 규율에 대한 관용과 복종, 불만을 참고 조절하는 능력, 그러면서도 조직의 관행에 맹목적으로 몰입되지 않는 내면의 열정과 자유로움이다. 코만도의 창설자인 클라크 중령은 병영생활을 폐지하고 코만도 부대원 전원이 민간에서 하숙하게 했다. 특공대에게는 자유와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습격보다 어려운 게 귀환이었다. 퇴로가 끊기면 그들은 도시와 마을로 숨어들어 탈출해야 했는데 그런 배려도 있었던 것 같다.
던포드는 제3코만도의 병사를 모집하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코만도 용사 중에는 배짱 좋고 터프한 병사들이 많았지만 던포드는 드라마에서처럼 불량배와 악당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던포드는 그들이 전투와 같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는 비겁한 겁쟁이가 된다고 믿었다.
실패로 끝난 첫 번째 작전
1940년 7월14일, 던포드 부대가 드디어 실전에 투입됐다. 목표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반도와 브르타뉴 반도 사이에 펼쳐진 삼각형의 만 중앙에 있는 건지(Guernsey) 섬이었다. 이곳에 있는 독일군 비행장의 항공기를 폭파하고 독일군 포로를 잡아 오는 게 던포드 부대에 떨어진 임무였다.
특공대는 장교 32명, 사병 102명이었다. 섬에 있는 독일군은 469명. 작은 섬이라 섬 어느 곳이든 경보가 울리면 20분이면 달려올 수 있었다. 코만도는 구축함을 타고 접근한 뒤 작은 구명정에 옮겨 타고 해안에 상륙했다. 해안 상륙시간은 자정을 넘긴 밤 12시50분. 작전시간은 2시간이었다. 구축함은 2시50분이 되면 무조건 철수할 예정이었다.
특공대는 의욕과 투지에 휩싸였지만 처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특공작전에는 기관단총이 필수장비였는데 이때까지 영국군은 기관단총이 없어 미제 톰슨 기관단총을 수입했다. 그러나 한 자루에 225달러나 하는 고가품이어서 총을 아낀다고 훈련 때는 만져보지도 못하게 해서 출정 전날 밤에야 지급받았다.
구명정은 민간인 자원자들이 조종했는데 계기 이상이 발생해 일부는 다른 섬으로 가버렸다. 해안에 제대로 상륙한 병력은 겨우 40명이었다. 게다가 배가 상륙정이 아닌 구명정이어서 해안에서 꽤 떨어진 지점에 코만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파도에 나뒹굴며 해안까지 걸어오느라 체력의 절반은 소진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민가의 개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순간 한 장교가 기지를 발휘해 개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이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협박이었다. 이 집, 저 집 다른 개들까지 합세해서 더 맹렬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독일군 전체가 다 깨서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병력 부족으로 엄호할 병력도 없었다. 전멸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겁먹지 않고 작전을 개시했다. 한 조는 절벽을 기어올라 기관총 진지를 덮쳤고, 다른 조는 독일군 막사와 비행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다. 비행장은 폐기된 지 오래였고 기관총 진지와 경비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여기까지 하고 보니 시간이 벌써 새벽2시45분이었다.
그들은 로프를 타고 절벽을 내려왔다. 그러나 빨리 내려오느라 너무 서두르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던포드의 권총이 땅에 떨어져 총소리를 내고 말았다. 독일군이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구축함은 떠날 시간이 됐다. 그러나 구명정은 암초 때문에 해안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던포드는 바다로 뛰어들어 구명정을 향해 헤엄쳐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사 3명이 수영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섬에 버리고 와야 했다.(그들은 포로가 됐다가 종전 후에 생환했다.)
돌이켜 보니 모든 게 엉망이었고 예기치 못한 실수투성이였다. 그러나 구명정에 올라탄 뒤에 던포드는 진짜로 기가 막힌 최대의 실수를 발견했다. 바다에 뛰어들고 넘어지고 하면서 그의 손목시계가 고장 나 버렸던 것이다. 시간을 물어보니 벌써 새벽3시반이었다. 구명정의 선원들은 민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그들을 기다려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헛된 희생이었다. 이미 구축함은 떠났을 터. 구명정으로는 영국으로 돌아갈 수도, 독일 전투기의 초계를 피할 수도 없었다.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던포드와 부하들의 전쟁은 끝날 상황이었다.
외부의 적과 내면의 적
구명정의 선원들처럼 발각되면 침몰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구축함마저 그들을 기다려 준 덕분에 던포드는 생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지 섬 작전의 실패는 코만도 반대파들의 기세를 올려줬다. 특공작전은 육해공군 모두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데 모두가 협력을 거부했다.
실패가 준 좌절도 컸다. 던포드는 건지 섬 작전의 소득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알게 된 것뿐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던포드와 상당수의 장병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낙담한 장병들은 바로 교체했다. 건지 작전의 실패 후 던포드는 실전만한 훈련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전을 잘 치르고 실전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또한 훈련뿐이었다. 다만 그 훈련은 실패에서 배운 경험을 총동원하고, 모든 지혜를 짜내 사태를 예상하고 대비하며, 매일같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개량하는 훈련이어야 했다. 던포드는 이 과업을 해냈고 그 다음 작전부터 코만도는 성공사례를 축적해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성공하기 시작하자 그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경이와 적극적인 협조로 바뀌었다. 전쟁의 방법과 전술에 대한 혁신적인 변화 역시 야기됐다. 오늘날 특수부대와 특수전은 2차 세계대전이 남긴 가장 획기적인 유산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두 가지 장벽을 만난다. 외부의 적과 내면의 적이다. 외부의 비협조와 몰이해, 비난, 방해에 대해서는 선구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넘어야 할 장애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창의와 혁신은 결코 현대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짐이 아니다. 유사 이래 역사에 전과를 남긴 명장들의 비결은 거의가 창의와 혁신이었다. 그런데 새롭고 낮선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거나 자신의 영역과 밥줄을 걱정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행위이다. 혁신을 이루려면 이런 현상에 대해 분노하고 흥분할 게 아니라 당연시하고 이해하며 그들을 설득한 방법과 전략을 모색하고 발굴하기 위해 1분이라도 더 노력해야 한다.
내면의 적 역시 쉽지 않은 장애다. 도전은 실패의 동의어이다. 말은 쉽지만 실수란 다 되짚어 보면 어처구니없고 사소한 일투성이다. 그만큼 비난받기도 쉽고 좌절하기도 쉽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를 복기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려면 뻔뻔함에 가까운 용기와 냉정함이 필요하다.
현대 자본주의와 경쟁체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승자의 영광은 수많은 실패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비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이 말이 단순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의미를 가지려면 승자가 딛고 올라서야 할 무덤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무덤일 때다. 스스로의 실수와 약점을 냉철히 돌아보며 극복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승리자라면 무덤의 절반은 자신의 무덤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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