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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리스트’와 승계 관리

한인재 | 67호 (2010년 10월 Issue 2)
2009년 7월 흑인 여성인 우르술라 번스가 복사기의 대명사이자 100년 기업인 제록스의 신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그는 포천 500대 기업의 수장이 된 최초의 흑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 제록스는 최초로 여성에서 여성으로 CEO 자리가 승계된 포천 500대 기업으로 남게 됐다. 
그런데 이 일은 당시 언론 등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미 제록스가 2007년에 번스를 다음 CEO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에 승계 소식 자체는 새롭지 않게 여겨졌다. 2000년대 초반 위기의 제록스를 구해낸 리더십으로 유명한 전임 CEO 앤 멀케이는 “2001년 내가 CEO가 된 바로 그해부터 이사회는 이미 누가 다음 리더가 돼야 하는지 논의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논의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진행됐다고 한다. 첫째, 만일 내일 누군가 CEO 자리를 대신해야 할 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둘째 ‘누군가를 CEO로 양성할 만한 충분히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이었다. 당시 4명의 후계자 후보 중 번스는 두 번째 시나리오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 
후계자 양성 계획에 따라 번스는 차차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맡게 됐다. 2005년 그는 이미 제록스 사업의 절반 정도를 관장했다. 오프라 윈프리에 이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으로 꼽히며 ‘재계의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전임 CEO 멀케이의 근황은 어떨까? 그는 최근 사임 의사를 밝힌 로런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의 유력한 후임자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제대로 된 리더 육성과 승계관리는 전임자와 후임자, 회사 모두에게 득이 된다. 리서치인사이트의 조사 결과, 리더 육성을 잘하는 20개 기업의 5년간 평균 총주주수익률이 S&P500 기업 대비 7.5배로 나타났다.
2010년 초가을 법규 위반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른 라응찬 회장이 신상훈 사장을 고소하면서 촉발된 신한금융지주 사태가 수습되지 않고 있다. 이후 신한은행 주가는 출렁였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신한은행 및 계열사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혹자는 사태의 원인을 권력욕에 휩싸인 ‘사람’의 문제로 본다. 배후에 있는 유력 정치인들 또는 정치집단 간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감독기관은 지배구조 문제가 곪아 터진 것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손보겠다고 한다.
 
기자는 이번 사태를 승계관리의 관점에서 한국 기업의 경영 체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사태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승계관리가 잘 되어 있었더라면 주주 직원 고객에게 주는 불안감과 경영상 타격은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 회장이 남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갑자기 사퇴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왔지만, 이사회는 물론 누구도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승계관리에 탁월한 글로벌 기업들은 어땠을까? 2004년 맥도널드의 짐 칸탈루포 회장이 심장발작으로 손쓸 틈 없이 사망했다. 그런데 맥도널드 이사회는 사망 후 단 2시간 만에 새로운 CEO를 선임해 혼란을 최소화했다. 미리 다음 후계자를 정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GE에는 ‘트럭 리스트’가 있다. 고위 임원이 트럭에 치였을 때 차례로 그를 대신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열해 놓은 것이다.
오너가 경영하는 한국 기업들은 2세, 3세 승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름 단련이 돼 왔다. 문제는 명확한 지배 주주가 없거나 있더라도 이사회와 전문 경영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이다. 특히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과 대기업, 국민주 방식으로 민영화된 기업들이 문제다. 내부에서 CEO를 양성하는 기능과 경험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다.
승계관리 전문가들은 “승계관리의 성공은 놀라움(surprises)을 최소화하는 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후임자를 육성해야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과 회사를 동일시해서도, 견제와 균형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 글로벌 장수 기업을 지향한다면 리더 양성과 승계 관리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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