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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힘 분산한 日, 미드웨이에 침몰하다

임용한 | 87호 (2011년 8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미드웨이해전 당시 일본군은 미군에 비해 항공모함의 수와 항공 전력에서 확실한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미군에 참패를 당했다. 미군 측에 일본군 암호가 해독돼 사전에 계획이 노출된데다 미군 급강하 폭격기대의 급습을 배겨내지 못한 게 표면적 이유다. 그러나 근본적 패인은 미드웨이해전 자체가 장기적 계획하에 세워진 게 아니라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급조된 전략이라는 데 있다.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군은 이상한 모순을 보였다. 그들의 작전은 용의주도하고 기발하며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국면에 대한 준비나 장기적 전략은 부실했다. 일본군의 형식주의, 경직되고 융통성 없는 조직 문화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보신주의, 관료적 책임회피까지 가미되면 장기 계획은 구체성과 방법론이 결여된다. 규정과 형식주의, 경직된 조직문화의 폐단은 이렇게 크고 무섭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미국을 침공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일본도 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라 태평양의 석유와 고무, 구리 등의 자원이 꼭 필요했다. 그들의 목적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손을 떼게 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맺는 것이었다. 미군이 태평양에서 물러나게 하려면 항공모함을 파괴해야 했다. 미군의 산업력으로 볼 때 1년이나 1년 반이면 항모를 새로 건조하겠지만 그 시간이면 일본은 태평양을 점령하고 요새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불안한 승리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은 10여 척의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0여 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됐다. 미군 사상자 수는 무려 24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군이 이 작전에서 입은 피해는 6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겉보기와 달리 완전한 실패였다. 원래 파괴를 목표로 했던 항공모함은 정작 항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비행단의 장교들은 항모 격침을 위해 3차 출격을 요청했으나 사령관 나구모 제독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공격을 중단시켰다. 그 바람에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항모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다음 단계에서 일본군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진주만 공격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은 그들은 승자의 자만심에 빠졌다. 게다가 그들은 다음 단계에 대한 전략이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우왕좌왕 논의를 거듭하며 이런저런 전략을 서둘러 계획하게 됐다. 여기에 육군과 해군의 이해관계까지 충돌했다.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육군은 육군병력이 필요한 작전을 무조건 반대했다. 그들이 미드웨이해전을 승인한 이유도 육군이 전혀 필요 없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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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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