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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中有訓

구양수의 멋: 술에 취하듯 산수에 취하다

고연희 | 145호 (2014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1. 구양수의 좌천

 

그림 속 산기슭에 몇몇 인물이 걷고 있다. 동자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이가취옹(醉翁, 취한 노인)’이다. ‘취옹은 송나라의 대학자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호(). 이 그림 제목의취정이란취옹의 정자취옹정을 말한다. 화면 중앙에 서 있는 작은 건물이취옹정이다. 취옹정이 있는 이곳은 중국 남부 안휘성 저주(). 안휘성은 기암절벽 황산(黃山)으로 오늘날엔 명승지라 애호되지만 1000여 년 전 북송시절 안휘성은 수도에서 멀고 산수마저 깊숙한 벽지였다. 빈한한 환경에서도 장원급제를 거쳐 관료에 오른 구양수였건만 상소를 올린 것이 황제의 뜻에 거슬려 이곳으로 좌천됐다. 이 그림은 구양수가 저주에서 태수생활을 하던 시절을 담아낸 글취옹정기를 그린 것이다. 천하의 명문취옹정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주를 둘러싼 건 모두 산()이다. … 봉우리를 돌아가면 산길이 구불거리는데 정자 하나가 날개를 펼치고 샘 앞에 임하고 있으니 취옹정(醉翁亭)이로다.” 이 정자의 이름취옹정은 취옹 구양수가 붙인 것이다.

 

2. 취옹의

 

구양수가 안휘성으로 쫓겨 간 때는 1045,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림 속 구양수는 기껏해야 40대 초반의 장년이다. 그런데 왜 자신을취옹이라 불렀을까. 옛 분들이 스스로를’()이라고 부르거나 남을이라고 예우할 때는 그 세월의 노고와 지혜를 존중하는 뜻이 내포돼 있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초상화들을 보면 노인의 흔적인 주름이나 검버섯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노인의 흔적이자 삶의 공적을 치하하는 코드였다. 또한 얼마나 취()하였길래 이름을취옹이라 했을까 싶지만 <취옹정기>에 따르면취옹의 의미는 술에 있지 아니하고 산수(山水) 사이에 있는지라 마음으로 취함을 얻어 술에 기탁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술에 취하듯 산수에 취했다는 뜻이다. 어떠한가. 그것이 예술이든 우정이든 혹은 사랑이든, 취할 것은 따로 있다. 술에 취함으로 의탁할 뿐이다. 그림 속 수염을 드리우고 휘청거리는 저 인물은 사실상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늙지도 않은 구양수 자신의 비유적 이미지, 멋진취옹이다.

 

3. 태수의 은밀한 즐거움

 

그림의 제목을 보면취정사혁’, 즉 취옹정 아래서의 활쏘기와 바둑 두기다. <취옹정기>를 읽어보면 취옹정 아래서 사람들이 활 쏘아 이기고 바둑 두어 이기느라 벌주의 술잔과 점수판의 산가지가 흩어져 있었노라며 그 흥겨운 순간이 묘사돼 있다. 태수와 백성들이 잔치를 벌였다. 잔치에서의 게임은 효과적이다. 제각기 승리를 좇는 흥분 속에 즐거움의 온도가 올라간다. 일상의 잔일을 모두 잊는 축제의 순간을 다함께 맞이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잔치가 끝난 후를 묘사하고 있다. “노을이 산에 지고 사람들이 흩어진다. 태수가 돌아가니 손님들이 따라간다는 구절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즐거웠던 순간들을 마음에 담고 모두 돌아가는 분위기를 놓고 구양수는 <취옹정기>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겼다. 이는 <취옹정기>의 마지막 구절이며 후대에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나무숲이 그늘지고 여기저기 새 소리라. 놀던 사람 떠나가고 새들이 즐겁게 노네. 그러나 새들은 수풀의 즐거움을 알 뿐이요, 사람들의 즐거움을 모른다. 사람들이 태수를 따라 놀며 즐겼지만 태수가 그들의 즐거움을 즐기는 줄은 알지 못한다. 취해서는 그들의 즐거움을 함께하고 깨어서는 이를 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태수로다. 태수가 누구냐? 여릉의 구양수로다.”

 

저녁 숲의 새들도 즐겁고, 잔치에서 돌아가는 사람들도 즐겁고, 앞장서 가는 태수도 즐겁다. 그런데 즐거운 영역이 다르다. 가장 중요한 즐거움은사람들의 즐거움이 분명하다. 새들은 그것을 모르고 태수는 그것을 알고 즐긴다. 위 글에서 매력적인 즐거움은 태수의 즐거움이다. 태수가그들의 즐거움을 즐긴다(樂其樂)”는 것은그들의 즐거움을 함께한다(同其樂)”는 뜻이다. 구양수는 태수인 자신의 이 즐거움을 남들이 알지 못해도 좋다고 말한다. 다만 이 말이 <취옹정기>로 남아 만고에 기억되고 있으니 혹자는 물을 것이다. 구양수가 그토록 훌륭한 태수였나? 요체는 구양수의 이 글로 기억되는태수의 즐거움이다. 누구라도 주변 사람이 몰라도 좋을 만한 자신만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구양수가 말한태수의 즐거움은 목민자의 즐거움에 대한 낭만적인 모범이었다. 누군가의 윗자리에 올라앉아 아래 사람들이 몰라줘도 상관없이 누리는 즐거움이 이럴 수 있을까. 마음만을 수행해서 될 일은 아니다. ‘태수의 즐거움을 은밀하게 누리고자 하는 꿈, 이 꿈의 전제는사람들의 즐거움이다.

 

4. ‘태수의 즐거움을 얻는 법

 

<예기>의 대학 편에재물을 모으면 사람들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는 문구가 있다. 탐욕스런 기업주가 일침으로 삼을 만하다. 재물만 흩는다고 될 일인가. 조선후기 학자 정약용(丁若鏞)윗사람이 돼 너그럽지 아니하고 예를 행할 때 공정함이 없으면 무엇을 보겠는가라고 한 공자의 어록을 상기시키며 목민자의 차분한 태도와 사유를 요구했다. 또한 다음의 글을 <목민심서>에 남겼다. “많은 말을 하지 말고 폭발적으로 노하지 말라.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거느리면 따르지 않을 백성이 없을 것이다.” ‘무다언 무폭노(母多言 母暴怒).’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대함이란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그 첫째란다. 스스로 말하기보다 상대방에게 말하게 하고 그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할애하란 뜻이다.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쁘게 할 것인가. 성내기를 참는 것도 너그럽게 대하기의 비법이다. 당신의 뜻을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분노할 때 상대의 마음은 기쁨에서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날 것이며 영원히 당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취옹정의 멋

 

조선시대 학자들은 중국의 유명한 누정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동경했다. 그들이 남긴 시와 그들이 감상했던 그림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중국 누정에는 등왕각(滕王閣)ㆍ악양루(岳陽樓)ㆍ황학루(黃鶴樓), 구양수의 취옹정(醉翁亭), 소동파의 희우정(喜雨亭) 등이 있다. 이 누정들은 모두 오늘날 중국의 관광지로 자리 잡은 터라 사시사철 여행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는 중이다. 누정마다 잊혀질 수 없는 역사적 일화가 얽혀 있기에 여행자들의 발길에 생각이 보태진다. 취옹정이 태수의 즐거운 잔치를 노래한 곳이라면 희우정은 가뭄에 내린 비로 백성들의 애환을 풀어준 때를 기념한 정자라고 이름이 희우(喜雨). 조선시대 박지원(朴趾源)은 벗의 새 정자에취옹희우정란 현판을 직접 써서 붙여주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라는여민동락(與民同樂)’을 명심하란 뜻이다. 즐거움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고통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여겼던 목민의 꿈이 전설적 교훈으로 기억되면서 작은 건물 누정의 멋에 큰 멋이 더해졌다. 조선후기 화원화가의 손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그 시절 왕실에서의 고전학습을 위한 서적 <예원합진>의 한 면이다. 이 그림의 왼쪽 면에는 <취옹정기> 전문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취옹정 아래서의 취옹태수 구양수의 즐거움, 조선왕실에서 아낀 덕목이다. 소통과 통섭을 중시하는 이 시대에 다시금 각별하게 취()해 볼 덕목이 아닐까.

 

 

고연희 이화여대 강사 [email protected]

필자는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 홍익대, 연세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했다. 조선시대 회화문화에 대한 문화사상적 접근으로 옛 시각문화의 풍부한 내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그림, 문학에 취하다>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등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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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연희

    고연희[email protected]

    - (현) 서울대 연구교수
    -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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