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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전설적 명장 신립, 탄금대에서 몰락한 진짜 이유

임용한 | 163호 (2014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조선 중기 시대의 대표적 무장으로 꼽히는 이가 신립이다. 임진왜란 전까지 신립은 전설적 명장으로 칭송받았지만 탄금대 패전으로 하루아침에무능한 장군으로 전락했다. 비난의 이유로 가장 크게 꼽히는 것이 그가 험준한 조령에 진을 치자는 부장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충주 벌판(탄금대)에 진을 쳤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령에 진을 쳤다고 한들 신립의 군대가 왜군을 막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패전의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 조선군의 훈련과 전술은 잘 훈련된 일본의정규군이 아니라왜구수준에 맞춰져 있었다. 당시 신립은 철기군을 이끌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미 전국시대를 거치며 철기병 시대를 종식시킨 지 오래였다. 소규모 비정규군인 왜구와 달리 일본 정규군은 당시 조선군의 전술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월등히 성장해 있었다. 변화한 적군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 조선이 저지른 진정한 실수였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6세기 말 조선에 혜성처럼 나타난 장군이 있었다. 바로 신립이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터지고 탄금대에서 패전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만 해도 신립의 명성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전설적 명장으로 칭송받던 신립

신립의 전설적인 명성은 두만강 유역에서 시작됐다. 46진 개척 이후로 조선과 여진족은 치열하게 싸웠지만, 중종대 초반 정도를 고비로 두만강 유역에서 여진과의 전쟁은 거의 종결됐다. 국경지역의 여진부락들은 거의 조선에 귀부해서 협력자가 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늘 사고 보고서만 올라오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지만, 조선도 여진족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여진족을 착취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거나, 북쪽의 반조선적인 여진족이 친조선파 여진족을 살해하거나 부락을 공격했는데 조선군 장수가 방관하거나 겁을 먹고 출동하지 않으면 당장 엄벌을 받았다.

 

그래도 국가와 민족이 다르니 여진족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고 분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반대로 조선은 여진족이 고분고분해지니 점점 나태해졌다. 사실 이런 표현은 옳지 않다. 장수들도 할 말이 있다. 강한 군기와 군사훈련에는 희생이 따른다. 탈영병이 생기거나 요즘처럼 총기난사가 날 수도 있다. 훈련 중에 사고를 당할 확률은 정말 높다. 여진족의 습격이 빈발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정도 희생은 전투로 인한 피해나 희생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보고가 전혀 없다면, 대신 훈련 중 사망 2명 혹은 탈영 10명이란 보고만 올라온다면 이것은 당장 문책 사유가 된다. 아니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는 공문이 내려올 것이다.

 

신립이 온성부사로 부임했을 때, 국경의 사정이 꼭 이랬다. 분노한 신립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사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 특히 중장갑 기병 500명을 양성해 돌격훈련을 반복했다. 기병 돌격훈련은 호쾌하지만 했다 하면 반드시 낙마사고가 나고, 낙마하면 사망이나 중상이다. 유가족은 화를 내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국경은 조용하고 다른 군에서는 이러지 않는데 유독 온성에서만 인명사고를 내고 있다고 말이다.

 

1583년 두만강 유역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여진족의 반란이었다. 반란이라고 하지만 완벽한 군사봉기는 아니었다. 민병대와 주민이 섞인 무장시위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전투 훈련이 돼 있지 않던 조선의 군현들은 하나같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하기에 바빴다. 여진족은 성을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조선군의 수세적 행동은 여진족을 고무시켰다. 반란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신립의 철기군이 등장한다. 그들은 병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진군중 속으로 돌진해 적장을 살해했다. 여진족이 도망치면 끝까지 추격해서 적을 강물에 몰아넣고 몰살시켰다. 신립의 호쾌한 전투는 단숨에 여진족의 기세를 꺾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그의 전투에 깊이 감명받았던 선조는 신립의 모친이 한양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그 집에 매일같이 술과 고기를 보내라. 혹시라도 노모가 몸이 편찮으면 자녀들이 즉시 승정원에 와 보고하라. 그러면 내가 직접 의원을 파견해 조치하게 하겠다.”

 

북방에서 돌아온 신립을 만난 선조는 그의 군복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는 즉시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입혀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사실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좌우간 나중에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도 선조가 이런 대우를 한 장군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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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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