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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Philosophy

설계 도면 있었다면, 두오모 성당 ‘돔’이 나왔을까?

박영욱 | 233호 (2017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만큼 연주에 대한 호(好)와 불호(不好)가 분명하게 나눠지는 경우도 드물다. 그의 연주는 지나치게 개성적이고 독특하다 못해서 규칙을 ‘위반’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베토벤 소나타 같은 고전주의 시대의 곡은 악보의 지시 사항을 엄격히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낭만주의 곡처럼 자신의 느낌대로 연주했다. 낭만주의자인 쇼팽의 곡은 엄격하게 박자를 지킬 경우 마치 행진곡처럼 딱딱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루바토(rubato), 즉 연주자가 임의대로 박자를 만들어서 연주해야 한다. 이에 반해서 고전주의의 곡은 정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베토벤을 루바토로 연주한 굴드의 연주는 전통적인 기준에 보자면 베토벤의 곡이 아닌 셈이다.


고전주의 음악은 왜 이토록 악보에 충실해야만 할까? 그것은 악보의 위상과 관련이 있다. 고전주의자들에게 악보란 작곡가의 머릿속에 있는 악상을 모두 담아낸 완전체로 간주됐다. 바로크 시대만 하더라도 악보는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으뜸화음, 딸림화음, 버금딸림화음 등의 화음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던 바로크 시기만 하더라도 저음부의 경우 연주자가 화음을 구성하는 음을 임의로 결정할 수 있었다.


바로크 음악과 달리 고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화음의 규칙을 엄격하게 체계화하고 그것을 악보에 담을 수 있다고 봤다. 이는 악보가 곡의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뻗어 나갔다. 고전주의자들에게 음악의 모든 정보는 악보에 담을 수 있는 것이며 기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악보가 작곡가의 머릿속에 있는 악상을 재현한 것으로 봤으며 악보의 모든 지시사항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야말로 곧 작곡가의 악상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마치 소설속의 여주인공을 묘사한 구절을 충실하게 읽으면 소설가의 머릿속에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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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악보에 의존하면 할수록 음악의 표현 가능성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악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19세기 말부터 서구의 음악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비서구권의 다양한 음악은 서양의 기보 체계로는 기록이 불가능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 역시 악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단지 기록을 위해서 궁중에 보관된 것이었지 그것을 보고 실제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악보로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 해서 하찮은 음악이 아니라는 사실은 곧 자신들이 사용하는 악보가 음악의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결정적으로 악보가 음악의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다는 이 재현주의의 환상이 깨진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의 시도를 통해서다. 유명한 작품인 ‘4분33초’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킨 케이지는 우연적인 작곡 방식과 부정확한 기보를 사용하며 음악을 텍스트로 재현할 수 있다는 서구음악의 환상을 모조리 뒤엎어버렸다.


텍스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건축에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축가들이 하는 일은 도면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건축물의 아이디어를 담은 스케치나 그림, 모형 등을 건축에서는 ‘다이어그램’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인들이 다이어그램은 만들 수 있지만 도면은 그리지 못한다. 가령 고객이 건축가에게 ‘이런 집을 지어주세요’라고 그림을 그려서 보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도면을 그리는 것은 건축가의 몫이다. 그것은 매우 정밀하고도 엄격한 엔지니어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건축에서 시공을 위한 도면이 사용된 것은 불과 150여 년 전부터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건축가였던 외젠 비올레르뒤크(Eugene Viollet-le-Duc, 1814∼1879)가 오늘날 사용하는 도면을 최초로 제작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예전에는 시공을 위해 도면을 제작하지 않았다. 건축이 도면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비올레르뒤크 이후 도면은 매우 정밀한 형태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건축이 도면 때문에 제약을 받는 결과도 나타났다. 수학적인 측정을 위해서 도면은 주로 직선으로 표현되고, 곡선은 원호와 같이 계량화가 가능한 형태만 사용됐다. 그러다보니 도면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 건축이 획일화된 것이 도면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도면이 일정 부문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대표하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성당)’의 웅장한 천장 돔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에 의해서 제작됐다. 이 엄청난 천장의 건축물은 압도적인 규모와 신비함을 자랑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직도 브루넬레스키의 돔에 관한 신비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돔을 설계한 도면이 없기 때문이다. 도면 없이 이 건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근대적인 도면을 만들었다면 오히려 이 신비한 건축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도면은 건축가의 머릿속에 있는 건축물의 재현이며, 시공은 그 도면을 통해서 건축가의 머릿속에 있는 건축물을 재현한다는 재현주의의 한계가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 체계와 기록 체계의 산물인 ‘텍스트’의 발견은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분명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은 예술의 방향이나 역량을 바꿔 놓기도 했다. 텍스트의 발전이 곧 예술의 발전은 아니다. 이런 사정이 예술의 분야에만 한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email protected]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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