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있다. 순수하고 가난한 남자 A, 재력과 지위를 겸비한 남자 B. B가 재력을 바탕으로 저돌적으로 사랑을 밀어붙이자 여자는 B에게 끌리게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함없이 여자를 사랑해 온 지고지순한 A에 대한 마음도 작아지지 않는다. 마침내 여자에게 최종 선택의 순간이 온다. 돈이냐, 사랑이냐?
이 매력적인 클리셰는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2004)’에서처럼 직접적으로 다뤄지기도 하고 때때로 드라마 ‘밀회(2014)’에서처럼 살짝 변주되기도 하며 오랫동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설, 드라마, 영화, 연극, 가요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대중문화에서 지치지도 않고 반복되면서 말이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왜 우리는 여태껏 이 클리셰에 열광하고 있을까? “짜릿해! 늘 새로워!”를 외치면서.
‘돈이냐, 사랑이냐?’는 질문의 유래
한국 대중문화계에 ‘돈이냐, 사랑이냐?’는 질문을 탄생시킨 기념비적 소설은 1913년에 발표된 『장한몽(長恨夢)』이다.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아이콘으로 더 유명한 이 작품은 1970년대까지 소설, 연극, 영화, 대중가요 등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수없이 반복 재현됐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좋더냐!”는 변사 투의 대사, 달 밝은 부벽루에서 검정 학생복 차림 남자가 발치의 여자를 걷어차는 장면은 이제 한국 대중문화계의 대표적 밈(meme)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돈이냐, 사랑이냐’는 문제, 즉 『장한몽』이 던진 질문은 작품 『장한몽』이 거둔 성공을 오랜 시간 뛰어넘어 왔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이수일과 심순애를 모르지만 이수일과 심순애가 던진 이 질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아침 드라마에선 순수한 서민 가정 출신 여자와 표독스러운 재벌 출신 여자 사이에서 남자 주인공이 갈등하고, 또 다른 프로그램에선 내가 가난했을 때 날 차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여자에게 자신이 거둔 성공을 과시하는 랩이 나온다. 마치 이수일, 심순애, 김중배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름을 바꿔가면서 ‘돈이냐, 사랑이냐’를 계속해서 묻고 돌아다니는 것 같다. 오늘날 트렌드를 읽는 기업인이 주목해야 할 성공은 작품 『장한몽』의 성공이 아니라 『장한몽』이 제시한 클리셰가 거둔 세월을 초월한 성공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부(富)와 사랑 사이의 갈등을 화두로 한 삼각관계가 『장한몽』 이전에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장한몽』 이전에 주가 됐던 질문은 『춘향전』에서처럼 ‘사랑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였다. 『장한몽』 이전의 세계에서는 재력, 지위, 명예, 덕, 인품과 같은 각종 자본들의 분리 가능성이 진지하게 사유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설의 질문은 ‘사랑이냐, 아니냐’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집약될 수 있었다. 춘향 앞에 나타난 이몽룡이 한때 거지를 가장(假裝)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춘향전』의 세계에서 재력이든, 지위든, 능력이든 변학도가 이몽룡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수일-심순애-김중배의 삼각관계와 비교해보면 이몽룡-춘향-변학도의 삼각 관계는 사실 출발부터 기울어져 있다. 무게추가 맞지 않는 『춘향전』의 삼각관계에서 선택의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사랑을 사수하는 게 화두였던 『춘향전』의 아름다운 세계에 ‘돈이냐, 사랑이냐’는 ‘천박한’ 질문은 어떻게 튀어나왔을까? 사실 『장한몽』은 원작을 수용 환경에 맞춰 ‘현지화(localizing)’한 번안 소설이다. 『장한몽』의 원작은 『금색야차(金色夜叉)』라는 일본 소설로 이 작품 역시 1902년 연재 당시부터 연극(신파극) 무대에서 수차례 상연되기도 하는 등 일본 대중문화계에서 열렬한 인기를 누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금색야차』도 『여자보다 약한 자(Weaker than Woman)』라는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출간된 로맨스 소설을 번안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비로소 다이아몬드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약한 여자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세 작품에 걸쳐 지속되는 삼각관계는 이렇다. 남자 A는 여자를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사실을 빼고는 B보다 낫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남자 B는 막대한 부와 지위를 겸비했지만 여자의 미모에 홀렸을 뿐 그녀를 A만큼 순수하게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자는 반복해서 고뇌한다. A의 순수한 사랑이냐, B의 재력이냐?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은 둘 중 무엇인가?
그녀들이 던지는 이 질문은 자본주의가 삶의 근본을 바꿔놓은 근대사회에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이냐, 정신이냐’는 철학적 질문이 ‘돈이냐, 사랑이냐’는 대중적인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다. 대체 무엇이 나의 행복을 보장해줄까? 태생적 신분이 아니라 돈이 미래를 보장하는 이런 세계에서 말이다. 사랑은 안온하지만 약하고, 부는 비정하지만 강하다. 그러나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덜 비참할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동아시아를 순차적으로 휩쓴 자본주의라는 태풍 속에서 이 질문도 같이 넘어온 것이다. 상륙하는 곳마다 바이올렛(『여자보다 약한 자』의 여주인공)을, 미야(『금색야차』의 여주인공)를, 심순애(『장한몽』의 여주인공)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 클리셰는 근대적 세계의 구조를 따지는 핵심 질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창조적 클리셰의 힘이탈리아 출신 비교문학자인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는 유럽에서 특정 소설 장르가 25∼30년 정도 인기를 얻은 후에 사라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이 유행의 주기가 독자층의 세대교체 주기와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독자층의 교체는 특정한 욕망의 교체로 이어지고, 특정한 욕망의 교체는 다시 그것을 반영하는 장르의 교체를 야기한다는 말이다. 이 같은 세대 단위의 스케일을 감안하면 작품 『장한몽』의 인기는 두 세대 동안이나 지속된 셈이니 베스트셀러에 스테디셀러의 자질까지 겸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장한몽』이 거둔 성공의 비결은 작품 자체보다는 본질적인 질문을 ‘여기에’ ‘최초로’ 던졌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중문화의 클리셰는 흔히 상투적이고 진부한 것, 창작의 수고를 결여한 껍데기, 다만 흥행 보장이라는 데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부차적 장치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클리셰를 상업성으로만 연결한 상상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클리셰를 사용한 모든 작품이 성공 가도를 달렸을까? ‘돈이냐, 사랑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해 온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실제로 성공한 작품은 손에 꼽는다. 클리셰를 성공적으로 활용한 작품들은 클리셰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이 무엇인지, 그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지금도 반복될 수 있는지를 꿰뚫었다.그러기 위해서는 표면에 드러나는 일상보다 훨씬 느리고 무겁게 움직이는 밑그림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현재 세계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그 구조를 직격하는 핵심 질문을 만들어낼 수 없고, 핵심 질문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클리셰도 만들 수 없다. 돈과 사랑을 저울질하는 삼각관계는 근대 세계의 삶이 겪는 중대한 갈등을 가장 직관적으로 집약했기에 오늘날 클리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1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의 밑그림을 결정하는 강력한 틀이다. 그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은 자본주의의 결함과 모순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왔다. 예컨대 ‘돈이냐, 사랑이냐’가 표현하는 질문은 오늘날 ‘좀비’를 통해 구체화된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 있는 시체들(the living dead), ‘좀비’가 대중문화계를 지배하는 클리셰로 격상한 역사는 20여 년에 불과(!)하다. 1980∼90년대만 해도 좀비는 B급 컬트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지금처럼 영화관과 서점에 범람하고, TV 채널 어딘가에선 반드시 등장하는 그런 클리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최근 비평가와 학자들은 좀비에게서 많은 질문을 찾아내고 있다. 예컨대 술사에게 조종당하는 부두교의 좀비는 생산시설의 부속으로 전락한 노동자를, 쇼핑몰에서 어슬렁거리는 좀비는 소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비자-대중을, 눈먼 식욕만 남아 있는 좀비는 인류를 절멸의 위험으로 몰아가는 자본 그 자체를 은유한다고 해석되곤 한다. 자본주의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전부 은유할 수 있는 좀비는 곧 자본주의 그 자체의 은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마치 좀비들과 같다. 자기복제와 증식이라는 유일한 법칙에 따라 움직여가지만 그 법칙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인간적’인 자본주의가 결정한 세계에서 인간적 삶의 목표와 가치란 어떤 것인가? 지금까지 가장 유효해 보이는 답은 영화 ‘28일 후’와 드라마 ‘워킹데드’가 내놓은 것 같다. 탈출하거나, 맞서 싸울 인간적 공동체를 구축하거나.
심순애의 질문도, 진화하는 좀비들의 질문도 그 끝은 자본주의라는 일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기업도 업계를 선도할 클리셰를 창조하고 싶다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결함을 적극적으로 사유해보면 어떨까. 동물실험 반대, 과대 포장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러쉬(LUSH)의 제품이 인기를 얻고, 커피 한 잔 내리는 데 15분이 걸리는 블루보틀(Blue Bottle)이 핫플레이스만 골라 지점을 내는 ‘커피업계의 애플’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간, 동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상품을 지향한 러쉬, 만드는 노동 그 자체로 가치를 되돌리는 블루보틀의 방식은 정확히 ‘비인간적’ 자본주의에 ‘인간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당신의 기업은 자본주의의 어떤 ‘비인간적’ 지점에 발 딛고 있을까? ‘윤리적 소비’에 필적할 만한 클리셰를 당신은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경림 서울대 국문과 박사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와 문학 연구가 만났을 때 의미가 뚜렷해지는 지점에서 한국 소설사를 읽는 새로운 계보를 구성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국민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주관 한국 근대문학자료 실태 조사 연구, 국립한국문학관 자료수집 방안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 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상아탑 너머에서 연구의 결실을 나누는 방식을 찾고 있다. 현재는 충북대, 한남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