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이 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앨리스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정말 이상한 일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이 전혀 위치를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앨리스는 숨이 턱에 차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오래 열심히 달리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텐데….’ 그러자 붉은 여왕이 대답했다. ‘그것 참 느려터진 나라로구나. 이 나라에서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힘껏 달려야만 한단다. 자리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적어도 지금보다 두 배는 빨리 달릴 수 있어야만 하지.’”
레드 퀸 효과
시카고 대학의 진화학자 밴 배일른은 이 이야기를 생태계의 쫓고 쫓기는 평형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아프리카 초원의 치타와 영양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상대방 또한 더욱 빨리 달리려고 애쓰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한다. 결과는 겨우 배를 곯지 않을 정도, 그리고 겨우 멸종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치타와 영양은 둘 다 더욱 빨리 달리는 쪽으로 진화한다. 그래서 이러한 진화론적 원리를 ‘레드 퀸 효과 (Red Queen Effect)’라고 부른다. 이 효과는 생물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사라져 버린 기업들의 얘기는 수없이 많다. 1800년대 후반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얼음사업이 큰 돈벌이가 됐다. 이 사업은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서 전 세계에 파는 사업이었다. 가장 큰 배는 한 번에 200톤씩 얼음을 싣고 인도를 향해 떠났는데 도착할 때는 녹지 않고 남는 얼음이 100톤가량이었다. 이 정도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빙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서 이 사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얼음을 캐내던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들에게 성공을 안겨주었던 그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더욱 성능이 좋은 톱을 도입했고, 더 좋은 창고와 더 좋은 운송수단을 찾아서 기존 경쟁자들 사이에서 우위에 서고, 똑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마케팅 학자 테오도어 레빗은 1975년 논문 를 통해 실패한 사업은 대부분 사업의 정의를 근시안적으로 잘못 내린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고객 중심이 아니라 제품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기업이 소비자의 요구(Needs: 1차적 결핍 상태)와 욕구(Wants: 2차적 결핍 상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술적이고 유형적인 의미로 제품 개념을 좁게 설정하게 된다. 그 결과 제품과 기술에 대한 지나친 맹종과 함께 자기 기만 증상이 드러난다. 그 내용은 1)기존 제품의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다 2)대체할 만한 경쟁 제품이 나타나지 않는다 3)대량 생산이 절대적이다 4)생산 코스트는 낮아진다고 하는 것들이다. 사업을 장기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자기 기만을 버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객의 욕구와 선호를 보다 효과적으로 만족시키는 시각에서 다뤄나가야 한다. 자기 기만은 변화 거부로 이어지고, 변화 거부는 알게 모르게 뒤처지다가 결국 시장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린란드 정착민의 교훈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소개한 그린란드 정착민의 얘기는 포용이 부족한 사회가 자연적,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직면해 적응에 실패하면서 몰락하는 처절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린란드는 대부분 얼음으로 뒤덮인 고원지대이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헐벗은 돌산이다. 놀랍게도 이곳에 서기 984년부터 거의 500년 동안 문명이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2400㎞ 이상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은 성당과 교회를 세우고, 라틴어와 고대 노르웨이어로 글을 썼으며, 철로 연장을 만들고 소와 양, 염소를 키웠다. 유럽의 최신 유행을 따라 옷을 입던 그곳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1500년대 후반 유럽인들이 그린란드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오직 이누이트 족들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바이킹들은 반달바다표범을 사냥하면서 살아가던 이웃의 이누이트와는 교역을 하지 않고 서로 적대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생각해보면 이누이트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린란드에서의 생존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바이킹 사회의 붕괴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인이자 유럽인으로 생각했으며, 목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유럽대륙에서와 똑같은 기독교적 생활양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린란드의 추운 날씨를 감안한다면 세련된 유럽식 의상보다 소매와 후드가 달린 이누이트의 모피 옷이 훨씬 적합했을 텐데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유럽의 패션을 세세한 부분까지 따라 했다. 그들은 그린란드에서 새롭게 닥치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근거를 노르웨이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찾았으며,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생활방식의 변화를 택하는 대신 유럽인보다 더 유럽인처럼 처신하려고 애썼다. 또 여러 가지 증거를 보면 그들이 이누이트인들을 전혀 벤치마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누이트인들은 눈(snow)으로 겨울을 지낼 이글루(igloo)를 지었고, 고래와 바다표범의 기름을 태워 집을 난방하고 조명을 밝혔다. 배를 지을 때는 골조에 바다표범 가죽을 씌워서 카약을 만들었고, 우미악(umiaq)이라는 배를 만들어 너른 바다로 나가 고래를 사냥했다. 고래는 아주 훌륭한 식량원이 되었다. 이 외에도 벙어리 장갑, 작살, 부레로 만든 부표, 개썰매 등 1500년대 후반에 다시 찾아온 유럽인들을 놀라게 한 이누이트인들의 훌륭한 생존기술을 바이킹들은 전혀 따라 하지 않았다. 또 그들은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물고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초기 정착민 가운데 생긴 금기사항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게 아닌가 생각되며, 무엇보다도 이웃한 이누이트의 생활양식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깔보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최후의 바이킹들은 어디론가 떠난 게 아니라 1400년대 어느 시점에 모두 죽은 것으로 보이며, 죽음의 원인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마지막까지 서로 간에 처절하게 싸우다가 생긴 상처들이었다. 변화를 거부한 대가로 끔찍한 종말을 맞은 것이다.
변화 거부는 스스로 암적 존재가 되는 것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는 상당 기간 따뜻하고 기분 좋은 사우나를 즐길 수 있지만, 결국은 죽고 만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쉽지만 냄비를 박차고 차가운 바깥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변한다는 것은 항상 아쉬움과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대 격언 중에는 “기저귀가 축축해진 아기 외에 변화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있다. 특히 성공한 조직에는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가장 큰 수혜를 받고 있는 기득권 집단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사업이나 전략의 도입이 가져오는 기존 사업의 매출이나 이익에 대한 잠식현상(cannibalization)을 염려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화로 인해 자기들이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조직내의 상대적인 중요도나 지위의 하락, 그리고 조직으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먼저 걱정한다. 그들이 바로 변화를 가로막는 사람들이다.
암세포는 자기가 만들어낸 변화나 신호를 스스로 증식과 성장의 지시로 받아들이면서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촉진한다. 또 성장을 억제하는 신호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으로 둔감하며, 정상조직에 영양을 공급해야 할 혈관을 슬쩍 자신 쪽으로 돌려놓기도 하고, 다른 조직으로 침투해 그곳에 정착하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변화하는 대신, 끊임없이 동일체의 반복적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결국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전체에 대한 파괴자의 역할을 하고 자신도 죽고 만다.
사람과 기업도 이와 흡사한 경우가 있다.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고, 남들의 비판에는 귀를 막고, 언제 어디서나 슬쩍슬쩍 끼어들어 남들이 뭐라고 하건 자기 이익만 챙기고 자기 주장만 항상 똑같이 반복한다. 권력을 잡으면 자기 사람만 쓰고, 한 번 잡은 권력은 영원히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이들은 전체에 앞서 자기를 내세우고, 흐름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며, 무한확장과 영구존속을 꾀하다가 결국은 전체를 힘들게 하고 자기 스스로도 파멸하고 만다. 우리는 그들을 ‘암적 존재’라고 부른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암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년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음악애호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