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 있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두 연예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들의 닮은꼴을 희화화한다. 유사성을 돋보이게 하려면 약간의 사진조작은 필수다. 화면 하단에는 친절하게 ‘싱크로율 100%’라는 자막이 적혀있다. 다음 장면에서는 포복절도하는 방청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청자들까지 웃게 하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있어야 한다.
우선 비교되는 대상들이 유명인이어야 한다. 사진 속 인물이 누군지 모른다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두 인물 사이에는 최소한의 연관성만이 존재해야 한다. 연관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효과는 커진다. 비교대상이 내국인일 때보다 외국인일 때, 동성일 때보다 이성일 때 웃음소리는 훨씬 크다. 반드시 사람일 필요도 없다. 시청자가 유사성을 지각하는 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동물도 매우 훌륭한 소재다. 한 마리 복어와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있는 여배우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러한 수법이 TV 예능프로그램에 한정된 것은 아닌 듯싶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것도 따로 있을 때는 웃기지 않은 두 얼굴이 함께 있으면 서로 닮은 것 때문에 웃긴다.”
왜 우리는 서로 닮은 두 얼굴을 보면서 웃는 것일까? 얼굴 자체가 우습기 때문에 웃는다는 설명은 훌륭한 답이 되지 못한다. 두 얼굴을 따로따로 볼 때는 전혀 우습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얼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웃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가 주먹만큼 큰 얼굴, 턱살이 펠리컨의 주머니처럼 늘어진 얼굴, 미간에 큰 혹을 달고 있는 얼굴 등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비정상적’이라는 말이 아름다움과 추함을 따지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웃음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의 주인공 콰지모도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얼굴을 보고 웃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닮은 두 얼굴을 보고 웃는다. 그렇지만 쌍둥이를 보면서 웃지는 않는다. 즉, 판박이처럼 똑같은 두 얼굴은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다. 웃음을 주기 위해서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웃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파스칼은 우스꽝스러움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는 차원들을 혼동하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여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감각을 통해 물건의 색과 모양을 인식할 수도 있고, 이성을 통해 물건의 숨겨진 성질을 인식할 수도 있다. 감각의 차원에서 볼 때 사물들은 각양각색으로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제의 느낌과 오늘의 느낌이 다르다. 반면 이성의 차원에서 인식된 사물들은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시간이 흐르고 위치가 변했다고 해서 한 사물이 다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파스칼은 감각과 이성의 차원 외에도 제3의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마음이 동해서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될 때 사람들은 심정의 차원에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한다.
“마음에는 마음 나름의 질서가 있다.”
누군가 사랑의 원인들을 차례로 설명해 가며 자신이 사랑받아야 함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심정의 차원과 이성의 차원을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 그가 받게 될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웃음이다.
차원을 혼동하는 사람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차원을 위해 다른 차원을 무시해 버린다. 이 점에서 우스꽝스러움은 일종의 압제다. 파스칼의 표현을 빌리면 “압제는 어떤 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다른 길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 독재자를 상상해 보자. “나는 강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군중에게 강제력을 동원해 자신을 칭송하는 시를 짓도록 한다. 하지만 누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겠는가? 대중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은 그가 힘이 세기 때문이지 아름답거나 현명하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장점에 대해 다른 종류의 경의를 표한다. 힘에는 두려움의 경의를, 아름다움에는 사랑의 경의를, 현명함에는 존경의 경의를 보낸다. 이 세세한 차이를 무시하기에 우스꽝스러운 압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성이 마음에게 ‘너의 원리에 동의해줄 터이니, 이 원리의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이는 무익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증명하는 일과 느끼는 일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정은 이성이 결코 알지 못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이성은 압제가 된다.
이성은 항상 동일성을 추구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성의 동일성에 따르지 않는 생각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성의 관점에서 매우 다른 두 사물을 간혹 매우 닮은 것처럼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 아닌 마음이 두 사물 간의 유사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일 때는 관심을 동반한다. 모든 관심에는 어떤 의도가 들어 있다. 사람들이 두 사물의 닮은꼴을 보고 웃을 때 그들은 그냥 웃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웃음 속에는 어떤 의도가 들어 있다.
잠깐 베르그송 이야기를 해보자. 그에 따르면 웃음은 타인의 실수를 바로잡아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자신의 구두끈을 밟고 넘어진 사람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는 세 살 어린 아이나 할 법한 실수를 한 것이다. 우리는 긴장과 유연성이 결여된 행동들을 보고 웃는다. 우리의 웃음소리를 듣는다면 실수를 한 사람은 바짝 긴장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다. 웃음은 ‘당신의 행동은 너무 경직돼 있으니 상황을 잘 주시하며 유연성 있게 대처하라’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경직된 행동뿐 아니라 경직된 사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성이 편의상 제시한 분류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외면하는 사람은 주변의 웃음거리가 된다.
사실, ‘싱크로율 100%’는 환상일 뿐이다. 두 그림 사이에 비교 가능한 대상이 100가지가 있다면 그 중 유사한 점은 한 가지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99가지 차이점을 무시하고서라도 한 가지 공통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다. 사람들은 기꺼이 웃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하품이 경직된 신체에 이완을 가져다주듯이, 웃음은 경직된 정신을 유연하게 해준다. ‘잘 웃는’ 대중들의 천박함을 지적하며 스스로 우쭐대는 사람들에게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유에서 옳다.”
파스칼에 따르면 웃지 않는 자들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고지식한 셈이다. 그들에게는 웃음이라는 자기교정의 능력이 결여돼 있다. 웃음은 경직된 행동과 사고를 이완시키기 위한 내재적인 자기교정이다. 이성에 지배돼 이성의 포로가 되어버린 나머지 웃음이라는 자기교정 능력을 잃어버리는 건 불행한 일이다. 마음의 치료제이기도 한 웃음을 억누르지 말자.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벵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김원철 철학박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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