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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Management

업무보다 서열? 속물주의가 경쟁력 해친다

정현천 | 103호 (2012년 4월 Issue 2)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책 <불안(Status Anxiety)>을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한 대목이 소개돼 있다. 후작 작위를 가진 친구와 저녁약속을 한 평범한 신분의 주인공이 아주 비싼 식당에 일찍 도착했다. 그러자 식당직원들은 주인공의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평범한 차림새를 보고 별 볼일 없는 손님으로 생각한다. 선심 쓰는 체하며 찬바람이 부는 바깥쪽 탁자로 안내하고 마실 것이든, 먹을 것이든 느릿느릿 가져다준다. 잠시 후 후작 친구가 도착하고 주인공이 그의 친구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순식간에 식당직원들의 태도가 돌변한다. 지배인이 그의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메뉴판을 펼치더니 화려한 동작을 섞어가며 특별요리를 읊어대고 주인공의 옷차림을 칭찬한다. 더구나 이런 예우가 귀족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원천봉쇄하려는 듯 가끔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호감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빵을 좀 달라고 하자 지배인은 뒤꿈치를 부딪쳐 딱 소리를 내며 소리친다. “알겠습니다. 남작님!” 이때 주인공은 처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남작이 아닌데요.” 그러자 지배인은 한술 더 떠서 “오, 죄송합니다. 백작님”이라고 한다. 주인공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포기하며 씁쓸해 한다.
 
 
경영 현장과 속물주의
 
속물주의라는 말은 ‘돈이나 지위, 세속적인 권력을 중시하고 당장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는 생각이나 태도’를 경멸하고 비아냥거리는 느낌으로 말할 때 쓴다. 사람이나 일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인정하려 하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단편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기준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그 서열에 따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같은 책에는 속물주의(Snobbery)의 영어 어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1820년대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여러 대학에서 응시자 명단을 쓸 때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 즉 작위가 없다는 말을 줄여서 ‘s. nob’이라고 써놓던 관례가 있었는데 여기서 속물, 즉 snob이라는 말이 유래됐다는 것이다. 이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뜻이 바뀌어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일컫게 됐다.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할 때는 경멸의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지위 등의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사회적, 문화적으로 한 가지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받들어서 편견을 드러내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가치중립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고자 할 때 속물주의, 또는 속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업경영 현장에서도 이와 같은 속물주의가 드러나는 현상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출신 학교를 보고 지원자의 잠재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소위 SKY 출신의 졸업자가 아니면 아예 뽑지 않거나 10대 대학의 서열을 매긴다거나 in-서울과 비-서울을 가르는 식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학생들 자신부터 대학, 기업까지 모두가 대학 서열 놀이에 빠져 있다. 어느 대학에 입학하는가가 평생을 두고 한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출신 대학이 어떤 범주로 묶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다시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업에서 사원들을 뽑아 일을 시키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일을 처리하는 능력과 기업 조직에의 적응능력이 출신 대학과 갖는 상관관계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상관관계가 있다면 그것마저 대개는 선후배 사이의 연대에 의해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 때문이다. 끼리끼리 문화를 아예 없앨 수 있다면 출신 대학은 능력과 거의 상관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열이 더 높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당연히 더 능력이 뛰어난 인재일 것으로 생각하고 기업들은 더 많은 취업 기회를 부여한다. 기업들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한번 사람들의 뇌리에 인식된 대학 서열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이나 소질, 소망에 관계없이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가기 위해 수험성적의 서열을 끌어올리는 것만을 과제로 생각하고 거기에 필요한 공부에만 열중한다. 비판적 사고와 꾸준한 인내심,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킹 능력 등 정작 기업에서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개발할 틈도 없고 아무도 그것들의 중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정작 기업은 자신들이 채용한 일류 대학의 졸업생들에게 실망하거나 학교 교육을 통해 이미 갖춰야 할 자질들을 교육하느라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된다. 한 바퀴 고리처럼 되먹임이 돼 결국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들이 손해를 보는 것이다. 기업들이 신입사원들로부터 기대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출신 대학에 관계없이 채용한다면 이런 손해는 크게 줄일 수 있을뿐더러 사회 전체의 비효율을 줄이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기업이 고객이나 Value Chain상의 Partner, 즉 협력업체들을 대하는 태도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식당 종업원의 태도가 아주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듯이 백화점이나 호텔 같은 서비스 현장에서 고객의 옷차림과 타고 온 차량의 종류는 종업원의 태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속한 조직의 성과보다 자신들이 받을 팁이나 영업수수료에 신경을 써야 하는 종업원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런 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더 많은 매출을 올려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잠재적으로 더 많은 돈을 쓸 것으로 보이는 고객을 판별해내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성과는 단순히 더 많은 매출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매출을 통한 영업이익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고객에게 전달하고 고객이 기꺼이 인정해 대가를 지불한 부가가치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과거의 성과만이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와 기업의 명성을 통해 미래에 실현시킬 수 있는 잠재적 가치까지 포함시켜서 생각할 수도 있다. 손님의 외양을 통해 판단한 우선순위에서 높은 위치를 점하지 못한 잠재고객들은 단순히 외면하고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구전효과를 불러일으키고 기업의 명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잠재적 가치를 포함해 생각하면 손님의 외양과 기업이 거두는 성과 사이의 상관관계 또한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웃어넘길 정도의 사소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법인고객이나 협력업체들을 거래규모나 해당 회사의 자산규모에 의해 순서를 매기고 차별을 두는 경우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이들의 전략적 가치는 정태적인 규모보다는 Value Chain상의 동태적인 변화, 즉, 환경에 따른 역할과 경쟁관계의 변화와 더 깊은 관계를 갖는다. 이들은 단순히 경쟁업체로 거래를 옮겨가는 것뿐 아니라 수직적 확장을 통해 그들 자신이 경쟁업체가 될 수도 있고 전후방 어디에선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Bottleneck(전체 시스템의 성능이나 용량이 하나의 구성 요소로 인해 성과가 제한되는 계약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부품 중에서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은 부품 한 종류가 있다고 하자. 처음에는 해당 부품을 몇 군데의 업체로부터 경쟁을 시켜가며 싸게 공급받을 수 있으나 수익성이 너무 떨어져서 업체들이 대부분 도산하고 단 한 군데만 남게 되면 갑자기 권력관계가 뒤바뀌게 된다. 비중이 크지 않을지라도 그 부품 한 가지로 인해 전체의 공급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전에 대했던 방식으로 그 업체를 대할 수 없게 된다.
 
 
경쟁력 해치는 속물주의
 
기업 내에서 더욱 심각한 속물주의의 양상은 의사결정 구조와 방법에서 나타난다. 조직에서의 위계에 따라 발언권이 정해지며 조직구조상 아래쪽에 위치한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이나 전문부서가 아닌 관련 부서 스태프의 의견은 무시되거나 조직의 상층부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내용이 복잡하지 않고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매우 정태적이어서 조직의 리더와 기능적인 전문부서가 조직과 해당 사안을 둘러싼 모든 영향요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이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조직의 위계와 권위, 의사결정의 권한이 일치한다면 보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효과성이다. 현재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변화가 극심하고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어느 한 사람 또는 소수의 한 조직이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 이럴 때 조직의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소수, 특히 조직 상층부의 정보와 의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잃지 않으면서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서열을 매기고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들을 연결하고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며 아이디어들을 때로는 경합시키고 때로는 상호작용하게 해 더 나은 아이디어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의 서열을 정보와 의견의 질() 또는 중요도와 일치시키는 속물주의는 기업의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효과성을 저해하며 이는 결국 경쟁력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얼마 전 골드만삭스의 고위직원 한 명이 해당 기업의 조직문화를 비판한 글을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골드만삭스의 기업문화는 아주 지독하고 파괴적이다. 그들은 고객을 ‘봉’으로 생각하며 고객의 돈보다 회사 이윤을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썼다. 과거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팀워크, 정직, 겸손, 고객우선 등의 문화는 찾아볼 수 없으며 고객에게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들이는지만 따지는 형편없는 문화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태로 골드만삭스 주가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 사건이 고객의 신뢰도에 끼친 악영향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다. 단기이익에 집착해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까지 든 예에서 출신 학교와 사원의 우수성, 협력업체의 규모와 전략적 중요성, 조직구성원의 위치와 의사결정에서의 역할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의 이윤의 중요성을 간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궁극적으로 기업이 목표하는 것을 위해 고려해야 할 변수는 매우 다양하며 그것들은 겉으로 쉽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두 가지의 외부로 드러난 변수에만 의존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성급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행태는 대부분 속물주의와 다를 바 없다. 기업들이 가치를 창출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의사결정은 가급적 신속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속물주의적으로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단순화, 특히 선입견과 일반화에 근거한 단순화는 정확한 현실인식을 어렵게 하고 다양성의 반영에 악영향을 끼친다. 일류 학교 출신들로만 신입사원을 선발하면 조직문화가 지나치게 경쟁적이 되거나 기대에 부응하는 경력을 개발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이 높아지고 만족도가 떨어진다. 고객의 필요를 만족시키기보다 고객을 꾀어 단기간에 이익을 내려는 태도는 금새 들통이 난다. Value Chain상의 협력업체를 쥐어짜기만 하는 것은 기업을 둘러싼 생태계를 건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곧 취약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기업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속물주의는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고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생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떤 속물주의적인 성격이 조직문화에 배어 있는지 잘 살펴보고 없애나가야 한다.
 
정현천  SK에너지 상무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년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최근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 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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