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시(陝西)성 주도 시안(西安)에서 북동쪽으로 200㎞ 떨어진 곳에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의 고향인 한청(韓城)이 있다. 이곳에는 사마천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데, 필자는 지난 주 한국 기업 최고경영자(CEO) 50여 분과 그곳을 방문해 사마천의 인생과 역사철학을 공부했다. 사마천은 역사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49세에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런 궁형의 위기를 겪었지만, 52만6000자의 사기를 통해 중국 3000년 역사를 되살려냈다.
그의 사당은 황하가 바라보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당 안에는 사성(史聖) 사마천을 기리는 후학들의 흠모와 존경의 예(禮)가 곳곳에 배어 있다. 고산앙지(高山仰止). 사마천 사당으로 들어가는 패방(牌坊)에 이렇게 쓰여 있다. ‘높은 산처럼 우러러 볼 만하다’는 사마천에 대한 숭모(崇慕)의 정이 묻어나는 구절이다. 사당 내부에는 ‘목연청풍(穆然淸風)’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현판도 달려 있다. ‘아름답고 맑은 풍격(風格)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사당 뒤에는 사마천의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지나면 사마천을 흠모하는 후예들이 세워놓은 수많은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에 새겨진 글귀 중에 가장 많은 내용이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나오는 글귀들이다. 화식열전에는 사마천이 기록한 중국의 재벌들과 성공한 사업가들의 경영철학과 인생의 가치가 담겨져 있다. ‘창름실이지예절(倉凜實而知禮節)하고 의식족이지영욕(衣食足而知榮辱)이라!’ 관중(管仲)열전에도 나오고, 화식열전에도 나오는 사마천의 경제철학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곳간(倉凜)이 가득 차야 예절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도 부끄러움도 안다는 뜻이다. 사마천의 경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철학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도덕을 알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백성들의 의식이 풍족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도덕과 예절을 강조해봐야 피부에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민생을 먼저 안정시키고 그 후에 교육을 통해 그들의 인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체라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물질적 안정을 기반으로 한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면 윤리든 도덕이든 따질 겨를이 없다. 유가 경전인 <맹자(孟子)>에도 백성들의 물질적 토대인 항산(恒産)이 안정돼야 도덕적 행위인 항심(恒心)이 실천될 수 있다고 했다. 왕도정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을 물질적 토대의 안정에 두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2000여 년 전 중국이나 현대 한국이 다를 리 없다. 전셋값이 폭등하고 물가가 급등해 많은 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학생들은 등록금 폭등으로 학업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젊은 청년들은 취업 불안으로 방황하고 있다. 서민들의 물질적 토대가 약하니, 민심도 바람 앞에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정치든 기업 경영이든 기본은 곳간과 항산에 있다. 그래야 국가도, 조직도 안정된다. 도덕과 예의, 항심도 나온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는데도 도덕과 예의가 바로 서지 않거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다면 이 또한 사회 불안의 불씨가 된다. 권력을 이용해 축재를 하는 정치인과 공무원이 늘고, 많은 돈을 버는 대기업이 힘없고 약한 중소기업을 괴롭힌다면 허름한 곳간마저 축나기 십상이다. 곳간을 든든히 채우고, 도덕과 규범을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국가나 조직 경영자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경영의 기본이다. 사마천의 화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우리 속담과 닮아 있다.
필자는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교환교수,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경영전쟁 시대 손자와 만나다> <손자병법으로 돌파한다> 등이 있다.
박재희 철학박사·민족문화컨텐츠연구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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