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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리더를 믿어준 미군, 中 인해전술 이겼다

임용한 | 84호 (2011년 7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50년 말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중공군은 30만명, 유엔군은 10만명이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분단 등 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이 복잡다단하다 보니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중공군의 참전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가 없는 가혹한 혈전의 시작이었다.

 

유엔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병력이 부족했다. 한국은 지도상으로 보면 작은 나라지만 산과 골짜기가 가득해 평야지대보다 병력이 몇 배로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과 모든 나라는 더 이상의 병력지원을 거부했다.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자기 나라는 자신이 지켜야 했지만 한국군은 훈련과 능력이 크게 부족했다. 의지와 열정이 있어도 능력과 조직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병력부족으로 유엔군의 담당구역은 언제나 전술교범보다 몇 배나 넓었다. 중공군은 이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중공군은 겉으로 보면 열악했다. 병사 개개인당 소총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무기와 전술도 낡았다. 그래도 필살기가 있었다. 1920년대부터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병사들은 전쟁에 단련돼 있었다. 낡은 전술이라도 전술에 대한 숙련도, 행군, 위장, 끈기와 참을성, 야간전투와 기도비익(耭導匪匿·내 의도를 적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함) 능력은 최고였다. 미군 정찰기가 매일같이 공중수색을 했음에도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미군과 한국군 전선에 접근하고 포위하기까지 수십 만 명의 병력이 단 한 명도 노출되지 않았다.

 

중국 땅에서 익힌 전술이었지만 이 전술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한국의 지형이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눈에 절대 들키지 않고 코앞까지 접근해왔다. 허술한 방어선과 지형을 이용해 일부를 후방으로 침투시켰다가 전투가 개시되면 침투부대가 먼저 후방에 있는 포대를 제압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그다음 전 부대가 몇 배의 병력으로 일제 공격을 시작했다. 소위 인해전술이란 말이 이 공격에서 나왔다.

 

유럽이나 중국의 평원이었다면 이런 공격방식은 공격 당사자에게 10배가 넘는 손실을 초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가파른 산악지형 덕분에 일단 산비탈에 붙으면 공격해 들어오는 모습이 위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진지에 바짝 다가온 다음에야 모습이 드러났다. 돌격거리는 잘해야 30m 정도. 이 짧은 거리에서 밀려드는 인파를 사격으로 무력화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야간공격을 선호했다. 중공군도 무조건 돌격한 게 아니다. 15m 정도로 접근하면 일제히 수류탄을 던졌다. 수십, 수백 발의 수류탄이 하늘을 새까맣게 덮으며 참호로 날아왔다. 밤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단순한 공격이지만 효과는 위력적이었다.

 

산비탈을 올라오는 중공군을 제압할 방법은 포격과 항공지원뿐이었다. 하지만 포병은 제일 먼저 공격받고 남은 포대도 보급로가 차단돼 탄약 보급이 금방 끊겼다. 항공지원은 흐린 날과 야간에는 무용지물이었다. 후퇴는 더 끔찍했다. 당시 한국 도로 대부분은 트럭 두 대가 비켜가기도 힘든 산악도로였다. 이미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은 도로 양쪽 산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죽음의 계곡이 됐다. 이 가공할 전술에 유엔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공포가 휩쓸었고 적을 이겨낼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지평리전투

1951 2 2사단 23연대는 원주방면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0군단장 아놀드 장군은 구멍투성이 방어선을 유지하다가 적에게 포위되느니 선제공격을 가해 적진을 헤집자는 구상이었던 듯하다. 단위 전투력과 기동력은 미군이 강하니 쥐 떼 속에 뛰어든 고양이처럼 주도권을 가지고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뛰어다니자는 전술이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마구잡이로 날뛸 수는 없으므로 적진으로 파고들어 대마, 즉 전략요충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 요충이 지평리였다. 철도와 한반도 중부로 내려오는 거의 유일한 도로가 지평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한 작전이었다. 23연대, 5400명의 병력이 지평리에 들어갔을 때 중공군 5개 사단이 이미 그곳에 잠복해 있었다. 쥐 떼는커녕 미군은 물속에 빠진 고양이 꼴이었다. 2사단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사단장부터 연대장까지 실전 경험자가 한 명도 없었고 그 이하도 거의가 그랬다. 23연대장 프리먼 대령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용모와 행동, 말투 모두 얌전한 선비 스타일인 프리먼은 사관생도 시절부터 한번도 두드러진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행정과 참모로 평생을 보낸 그는 유능한 작전참모라는 평은 들었지만 늘 본국과 후방에 있어서 참모로도 전쟁터에 가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연대장이 된 것은 오직 친구를 잘 둔 덕이었다.

 

실전경험이 없는 지휘관들 덕분에 2사단은 두 번이나 참극을 겪었다. (DBR 83적유령 전투, 2사단의 비극참조) 그런데 세상에는 항상 예외가 있다. 프리먼은 전투 지휘관으로서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고 한국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미군 지휘관 중 한 명이 됐다.

 

프리먼, 기존의 전투 법칙을 버리다

한국전쟁에서 전투의 법칙은 고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고지에 봉우리를 따라 진을 치려고 하니 범위가 너무 넓었다. 프리먼은 고민하다가 고지를 버리고 평야와 얕은 구릉을 따라 사각형의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방어선의 길이는 1.6, 방어선에서 높은 고지는 240m 정도였다. 주변에 400m가 넘는 고지들은 중공군이 장악했지만 거리가 멀어 기관총의 사거리 밖이었다. 포격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탄약을 최대한 비축했다. 이로써 중공군이 방어선 안으로 파고들거나 포병이 각개 격파될 위험은 없어졌다. 포위를 대비해 방어선 안에는 간이 활주로까지 닦았다. 이로써 항공보급은 유지됐다.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프리먼의 구상은 진가를 드러냈다. 사각형의 미군 방어선에는 각 방향으로 망대 역할을 하는 작은 고지들이 하나씩 있었다. 그곳들은 모두 중공군의 주 공격 목표가 됐다. 작은 산을 향해 사방에서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광경은 중공군이 잘 보이지 않는 높은 고지에서 보이는 광경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큰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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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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