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미국 주요 테크기업 A사에서 근무하는 김지웅 시니어 프로덕트 매니저가 10회에 걸쳐 한국과 미국의 직장생활을 비교하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필자는 “A사 외의 미국 기업은 다녀보지 못했고 근무기간이 1년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 표피적인 단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환경에 더 익숙해지기 전, 지금이 오히려 이런 글을 쓰기에 적기라고 생각한다”라고 합니다.
미국 주요 테크기업 A사에서 근무하면서 익혀야 했던 영어가 있다. 온갖 약어들이다. 이를테면 POV(Point of View, 관점/의견), CIL(Comments in Line, e메일 답장할 때 보낸이의 질문에 바로 바로 답을 다는 방식), IMO(In my opinion, 내가 보기엔) 이런 식이다. 그러나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약어는 단연 OOTO와 WFH이다.
OOTO는 ‘Out of the office’의 약자다. 말 그대로 자리를 비운다는 뜻이다. 사유는 제각각이다. 휴가를 낸다든지, 출장을 갈 때 자신과 밀접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John - OOTO 2/1-2/10” 이런식으로 일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거기에 꼭 자신이 인터넷 접속이 어렵다든지 통화가 안 되는 경우라면 이를 명시한다. 한마디로 회신은 기대 말라는 이야기다. OOTO의 사유는 휴가와 출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병원을 가야 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이사를 한다든지 등 각종 사연들이 총출동한다.
필자도 병원을 가야할 일이 생겨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OOTO 공지를 띄우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병가를 냈다. 이곳의 휴가, 병가 등은 시간 단위로 올릴 수가 있다. 그래서 오후
3시에 퇴근할 심산으로 오후 3시부터 오후 5시까지 OOTO 일정을 띄우고, 병가를 2시간을 올렸다. 그런데 매니저가 나를 조용히 부른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 병가 결재를 반려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유는? 병원 갈 일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생길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개인 휴가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부당하다. 왜냐면 병원은 우리가 일하는 시간에만 열리지 않느냐. 게다가 밤이나 주말에 한두 시간 일해야 할 경우가 있지 않냐. 그러니깐 괜찮다. 그러면서 아주 기쁜 표정으로 반려 버튼을 누르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또 자주 사용되는 약어는 WFH, Working from home이다. 재택근무를 한다는 뜻이다. 이건 정말 이유도 다양하다. ‘오늘 내가 사는 곳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WFH’ ‘오늘 배관공이 찾아오는 날이라 WFH’ ‘몸이 안 좋아서 WFH’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유들이 명시돼 동료들의 일정이 날아온다. 개근상을 타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칭찬해주던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날아드는 WFH 메시지가 생소하고, 또 가끔은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게 사실이다.
어느날 한 동료로부터 ‘애가 몸이 아파서 WFH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순간 애가 아프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가 과연 내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그것도 아빠가) ‘애가 아프다며 재택근무 하겠습니다’라고 e메일 하나 덜렁 보낸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봤다. 본인이 아파도 출근해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아이가 아프다며 재택근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까.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우선, 인프라의 차이다.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회의는 콘퍼런스콜로 참여하면 된다. e메일이나 회사 시스템으로 언제 어디서나 동료들과 함께 편리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인프라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둘째 이유이자 충분조건은 ‘자율과 책임’의 기업문화다. 직원을 믿고 자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성과와 책임의 문화도 뒷받침돼야 한다. 어디서 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잘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사고방식. 다시 말하면, WFH 하면서 일을 잘하면 그 누구도 출근을 안 했다고 뭐라 해서는 안 되고, 반대로 아무리 출근을 열심히 해 얼굴도장을 찍어도 일에서 성과를 못내면 알아주지 않는 문화여야 한다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이런 자율과 책임의 기업문화에는 꼼꼼한 기록문화와 투명한 정보공유가 전제돼 있다. 필자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근무시간에 병원을 가야 한다면 당연히 다녀올 수 있었다. OOTO를 아웃룩 캘린더에 공유만 안 했을 뿐이지 그런 유연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부장님만 아는 사실이다. 다른 팀과는 공유되지 않으며 또 그런 병원 방문의 사실은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곧 잊혀질 것이다.
OOTO나 WFH를 예로 들면서 미국의 기업문화가 훨씬 더 유연하며 융통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직원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기록되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봐야 한다. 무엇을 하든 자율적으로 하되 그 모든 일정은 기록되고, 또 공유된다. 이런 극단적인 투명성이 전제돼야 재택근무와 유연한 근무는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직원들은 재택근무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정을 완전히 공개하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 해이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기업은 결국 재택근무를 폐지 또는 축소하는 형태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맞벌이가 늘면서 결국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에게 외국의 재택근무 사례는 늘 꿈과 같은 이야기다. 동의한다. 재택근무는 일과 삶 사이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유용한 제도다. 그리고 직원이 행복해야 기업도 잘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한국의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시도하다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술적 투자는 물론이고 기업문화적 관점에서도 갖춰야 할 부분들이 많다는 걸 인식하고 제대로 도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더 이상 아픈 아이가 어린이집에 맡겨지고, 엄마 아빠는 출근해서 퇴근시간만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한국 사회의 흔하디 흔한 일상이 사라졌으면 한다. 아이가 아프면 WFH 공지 하나면 충분한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게 흐르는 ‘신뢰’가 부러울 따름이다.
김지웅 시니어 프로덕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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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국 주요 테크기업 A사 시니어 프로덕트 매니저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마쳤고 한국 MBC에서 전략, 광고, 콘텐츠 유통, 신사업을 담당한 바 있다.